조성준 기자
입력 2020-12-08 08:01teen.mk.co.kr
2025년 01월 15일 수요일
[죽은 예술가의 사회] 1950년대 초였다. 뉴욕 미술계 전체가 액션 페인팅 화가 잭슨 폴록 찬양에 빠져 있었다. 앤디 워홀은 이 시기에 뉴욕에 입성했다. 광고회사에 들어가 일러스트레이터로 경력을 쌓았다.
워홀은 '뉴욕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이 대회는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릴 만큼 권위가 있다. 10년간 광고회사를 다닌 워홀은 성공한 상업 디자이너 지위를 누렸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잭슨 폴록처럼 슈퍼스타 예술가가 되기를 꿈꿨다. 뉴욕의 한 갤러리 주인이 워홀에게 말했다. "이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서 이야기를 찾아야 해. 수프 캔을 그려보는 건 어때?"
워홀은 이 제안에서 성공의 냄새를 맡았다. 그는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자신도 자주 먹는 캠벨 수프 통조림을 떠올렸다. 1962년 워홀은 32개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려 전시했다. 그렇게 팝아트 시대가 개막했다.
◆ "대통령도 나와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워홀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미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TV를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는데, 대통령이나 우리나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돈을 더 준다고 더 나은 코카콜라를 마실 수 없다."
워홀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대중문화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코카콜라처럼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제품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대중은 워홀의 실험에 호응했다.
워홀은 1964년 뉴욕 맨해튼에 스튜디오를 연다. 워홀은 스튜디오를 '팩토리(공장)'라고 불렀다. 이 공장에서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팝아트 작품을 대량 제조했다. 예술 작품을 대량생산한다는 개념 자체가 예술로 받아들여졌다. 팩토리에는 온갖 뉴요커들이 드나들었다. 매일 밤 파티가 열렸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팩토리 안에서 함께 춤을 추고 영감을 나눴다. 워홀의 팩토리는 예술 공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 총에 맞은 앤디 워홀
워홀은 죽음이라는 주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1962년 메릴린 먼로가 세상을 떠난 직후 워홀은 먼로 얼굴로 연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표작은 '메릴린 제단화'(1962)다. 워홀은 전성기 시절 먼로 얼굴 50개를 나열했다. 왼쪽 25개 캔버스에서 먼로 얼굴은 생기 넘치는 금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오른쪽 25개 캔버스 속 먼로는 흑백이다. 오른쪽으로 향할수록 얼굴은 점차 희미해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먼로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워홀은 대중문화 이미지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살았고, 그것을 긍정하며 예술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공허함도 봤다. 먼로의 실제 삶은 불행과 고독으로 가득했다. 스타가 되긴 했지만 행복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사는 먼로의 섹스 심벌 이미지뿐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먼로는 섹시한 여배우 대명사로 소비된다. 워홀이 스타의 죽음을 주제로 삼은 건 이미지가 전부가 돼버린 시대의 비정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집착한 워홀은 실제로 죽음 문턱까지 다녀왔다. 1968년이었다. 워홀 팩토리에 드나들던 인물 중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이 있었다. 솔라나스는 작가였는데, 워홀이 자신의 작품을 하찮게 여기자 앙심을 품었다. 솔라나스는 워홀에게 세 발의 총을 쐈다. 긴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진 워홀은 이 총격 사건 이후 다른 사람이 됐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신경질적인 인간으로 변했다.
괴팍해진 워홀은 본격적으로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아예 해골 이미지로 연작을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부자와 유명인 초상화를 그리며 막대한 대가를 받기도 했다. 뉴요커답게 그는 계속 돈을 벌어 풍요로운 삶을 유지했다. 동시에 그 풍요를 한번에 앗아갈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었다. 워홀은 죽음이 일찍 자신에게 찾아올까 두려워 병적으로 건강관리에 집착했다.
하지만 그는 허무하게 떠났다. 1987년 담낭 수술 중 의료사고로 59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홀은 자신의 겉모습만 봐달라고 했다. 자본주의, 소비문화 시대의 승리자. 이것이 워홀의 표면이다. 하지만 그가 인생 후반부에 남긴 죽음의 이미지들은 표면 뒤의 다른 워홀을 상상하게 한다. 거기에선 성공을 누리는 와중에도 '결국 이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린 사람의 공허가 느껴진다.
보통 사람의 삶은 워홀 작품처럼 비슷한 이미지의 나열로 가득하다. 우리는 매일 같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간다. 어제와 비슷한 일을 하고, 유사한 고민을 한다. 일상은 귀찮고 지루한 과제로 가득한데, 이 모든 것이 계속 반복된다. 그래서 가끔씩 멈춰 서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이 시대가 만들어낸 그저 그런 이미지 중 하나일 뿐인가' '나는 돈 버는 기계인가' 이런 자기연민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삶에 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다.
세속적인 성공에 광적으로 집착한 워홀도 이따금 죽음을 생각하며 멈췄다. 기계처럼 끊임없이 성공 신화를 찍어내던 워홀은 이 모든 것이 한번에 사라질 것을 알았다. 우리도 워홀처럼 언젠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허무에 유혹당하지 않고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몸을 움직인다. 워홀은 이렇게 말했다.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