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영배는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술을 채우면 잔에 술이 가득 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 비워지는 신기한 술잔이다. 원래 이 술잔은 중국 유교 의식에 사용되던 의기(儀器)에서 유래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만주의 거상 임상옥이 소유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계영배는 술이 잔 용량의 70~80% 정도 채워진 후 그 이상을 따르면 공기압과 술의 압력 차를 이용해 잔이 비워지도록 설계됐다.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이름처럼, 과학적 원리보다 그것을 만든 의도와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사람들로부터 주목받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임상옥과 같은 거부가 자신의 탐욕과 타락을 경계하기 위해 이 잔을 활용했다는 점이 더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계영배는 절제와 균형을 상징하는 기능 외에도 실제 사용자들이 과도한 음주를 피하고 절주를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임상옥과 같이 분별력 있고 의지가 굳은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절제 장치라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잊지 않도록 하는 상징적 역할을 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이 이런 잔을 활용하는 것은 더 실질적인 절제 수단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도 계영배와 같은 상징적이면서도 실효성 있는 절제 장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계영배의 기능과 의도는 행동경제학에서 설명하는 계획자-행동자 모형과 맞닿아 있다. 행동경제학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세일러(Richard H. Thaler)는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생애 전반의 만족을 극대화하려는 계획자(planner)와 현재의 쾌락을 중요시하는 행동자(doer)라는 두 자아가 대립하는 과정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했다. 세일러에 따르면 계획자는 미래를 고려하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목표를 세우는 반면, 행동자는 당장의 만족에 우선순위를 두며 계획자의 의도를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형은 사람들이 금연, 다이어트, 저축과 같은 목표를 세우고도 실천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설명한다.
또한 학생들이 시험 기간에 대비해 공부 계획을 세우거나, 방학을 앞두고 여러 생산적 목표를 설정하고도 이를 지키기 어려워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자는 시험 기간을 앞두고 미래의 좋은 성적표를 목표로 공부 계획을 세운다. 계획자는 성적 향상을 위해 규칙적인 공부와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판단하지만, 막상 실천할 때가 되면 지금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동자가 방해를 하곤 한다. 행동자는 "지금 잠깐 쉬어도 돼", "오늘 하루 놀아도 내일 공부할 수 있어" 같은 핑계를 만들어내며, 계획자의 노력을 방해한다.
행동자가 이렇게 쉽게 계획을 방해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행동경제학에서는 쌍곡형 할인(hyperbolic discounting)으로 설명한다. 쌍곡형 할인은 사람들이 먼 미래보다 가까운 미래의 편익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말한다. 쉽게 말해 먼 미래의 성적이나 건강한 몸은 높은 할인율로 저평가하지만 당장 수고해야 하는 공부나 운동은 상대적으로 더 힘든 것으로 고평가한다는 것이다.
행동자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방해 요소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행동경제학에서 계영배는 유혹 극복을 위한 장치로 해석될 수 있다.
행동자의 자아가 나타나기 전에 돛대에 자신의 몸을 묶었던 오디세우스처럼, 계획자의 목표를 지키고 행동자를 견제하기 위해 계영배와 같은 장치가 필요하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도중에 발생하는 작은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서도 계영배가 제시하는 '넘침에 대한 경계'는 좋은 교훈이 된다. 예를 들어 시험공부를 할 때 먼 미래의 성적 향상을 보상으로 삼기보다는, 작은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좋아하는 간식과 같은 소소한 보상을 주거나 목표 미달성 시 집 청소 같은 작은 징벌을 내린다면 행동자의 유혹을 극복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목표를 설정할 때는 이성적 상태에서 미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만, 이를 완수하는 과정에서는 행동자가 장기적 가치보다는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계획자가 세운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그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동기 부여와 함께 실질적인 방어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작은 보상 체계 혹은 계영배와 같은 음(-)의 인센티브를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행동경제학적 관점에서 계영배는 단순 절제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갖춰야 할 실질적 장치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준다. 각자 자신의 행동자를 제어하고 계획자가 설정한 목표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나만의 계영배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