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6년 01월 13일 화요일

찬란했던 신라 천년, 경주의 황금빛 낭만

이병철 시인

입력 2025-05-19 09:10
목록

황리단길의 해질 무렵.

 

 

경주의 아침은 경쾌한 노래로 왔어요. 고택에서는 놋그릇 부딪치는 소리, 밥 짓는 냄새, 빗자루로 마당 쓰는 소리, 장독대 항아리가 튕겨내는 치자꽃과 댓잎의 향기마저 모두 음악이었거든요.

 

팔우정 해장국거리의 한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나오자 그새 햇빛이 너르게 퍼져 있었어요. 대릉원의 커다란 고분들 사이사이로 색감이 짙은 푸른 하늘이 빽빽하게 몸을 끼워 넣는 중이었지요. 38000평의 평지에 스물세 개의 능이 솟아 있는 이곳 고분군에는 천마총과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이 있어요. 한 손에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든 채 옛 신라인들의 무덤 사이를 걸었어요. 1973년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황금 장신구들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지만, 늦봄의 태양이 대릉원을 걷는 사람들의 머리마다 금관 하나씩을 씌워주고 있었어요.

 

 

 

황리단길 카페 스컹크 웍스'.

 

드넓은 대릉원을 걸었더니 소고기국밥이 벌써 다 소화가 됐어요. 목이 마르고 입이 심심해져 황리단길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카페 '스컹크 웍스'를 찾았어요. 달걀 토스트와 말차라테가 유명한 집이죠. 음료와 곁들여 먹는 디저트 음식이 맛있기로 입소문 났지만, 이 카페의 유난한 매력은 고풍스러운 한옥 마루에 앉아 교자상을 두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SNS에 올릴 만한 '감성 사진'을 찍기 좋다는 점이에요.

 

황리단길의 가게들은 전통 한옥 형태의 공간에서 피자, 스테이크, 파스타, 수제 맥주, 아이스크림, 마카롱 등 서양 음식을 팔아요. 그래서 누군가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우려하지만 저는 오히려 전통과 유행의 아름다운 조화라고 생각해요. 황리단길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 찍는 젊은 남녀들이 유행만을 좇는 것은 아닐 거예요. 별생각 없이 경주에 놀러 왔다가도 여기저기 널린 신라의 찬란한 유산과 마주하는 순간, 황리단길을 거니는 즐거움만큼이나 우리 전통문화와 역사에 관한 관심 또한 깊어질 게 분명해요.

 

카페 툇마루에 앉아 나무 바닥의 서늘함을 몸속으로 들이면서 달걀 토스트와 얼음을 띄운 아메리카노를 맛있게 먹고 마시는 사이 오후가 됐어요. 한옥에서 먹은 토스트와 커피는 뉴욕식 점심이 된 셈이죠.

 

 

 

황리단길 이곳저곳을 걸었어요. 장미 덤불을 늘어뜨린 붉은 담장을 지나, 추억의 옛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어린 연인들의 풍경을 지나, 안전모를 쓰고 유적 발굴 작업 중인 인부들을 지나, 볕 좋은 구멍가게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어르신들 몇을 지나는 동안 신라의 오늘을 봤어요. 이제는 신라의 어제를 향해 걸음을 옮길 시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저는 옛 화랑처럼 뺨이 붉고 눈이 맑은 소년이 된 것만 같았죠.

 

국립경주박물관 선덕대왕신종.

 

경주를 떠올릴 때면 에밀레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 신비한 소리로 제 마음을 휘감아요. 보존을 위해 이제는 타종하지 않지만 종 앞에 서면 녹음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국보 제29호인 이 거대한 동종은 국립경주박물관 입구 오른편에서 신라를 찾아온 오늘의 사람들을 가장 먼저 맞아줘요. 바람과 새소리, 봄의 녹음, 땅의 지금과 하늘의 영원을 모두 품어 안으며 맑고 은은하게, 또 짙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천이백년 전부터 땅과 하늘에 두루 닿는 것이었어요.

 

성덕대왕신종의 소리가 뒤에서 등을 떠밀어,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천마총과 금령총, 다보탑과 석가탑을 지나 왕과 여왕의 시대, 마립간과 이사금의 옛날, 혁거세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갔어요. 권삼윤의 책 '나는 박물관에서 인류의 꿈을 보았다'를 인용하자면 저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 사람들의 꿈과 낭만을 봤어요. 그 천년의 낭만은 지금까지 전혀 녹슬지 않은 채 생생한 빛을 뿜어요. 동궁과 월지의 야경이 특히 그러하지요.

 

 

 

동궁과 월지의 야경.

 

동궁과 월지의 야경을 보기 전엔, 그 황홀한 빛의 누각을 보며 저절로 탄성을 뱉기 전엔 경주에는 와도 신라에 온 것은 아니에요. 천마총 내부처럼 사방이 캄캄해질 무렵, 경주는 마침내 서라벌의 금빛 주단으로 옷을 갈아입어요. 그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벌써 매표소 앞에 긴 줄을 만들고 있었어요. 상인들은 야광봉과 팔찌, 불빛이 번쩍거리는 부메랑, 솜사탕을 팔고 거기에 눈이 팔린 어린아이들부터 젊은 연인들, 학생들, 노인들, 또 외국 여행객들까지 모두 얼굴이 환했죠.

 

어두운 밤하늘 아래 금관처럼 빛나는 동궁과 그 화려한 불빛을 고요히 머금은 채 작은 파장에도 투명한 종소리를 수면 위로 띄워 보내는 월지를 보노라면 누구나 꿈속 신라에 닿게 돼요. 현장 학습을 온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조를 나눠 경주의 문화재에 대해 발표를 준비한 모양인데, 친구들에게 동궁과 월지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하는 앳된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해졌어요. 천 년 전에도 이런 낭만적인 밤은 있었겠지요?

 

 

———————————————

 

 

대왕암 문무대왕릉은 경주 감포읍에 있어요.

경주역과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감포까지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어요.

문무대왕릉 외에도 이견대, 감은사, 송대말등대, 해국길, 감포항 등 가볼 만한 곳이 많아요.

틴매경
구독 신청
매경TEST
시험접수
매테나
유튜브
매경
취업스쿨
매일경제
아카데미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