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시인
입력 2025-03-10 09:01teen.mk.co.kr
2026년 04월 16일 목요일
서울에 있는 시비(詩碑) 도장깨기

이병철 시인
입력 2025-03-10 09:01서울에 시비(詩碑)가 몇 개나 있는지 아시나요? 생각보다 많답니다. 늘 다니던 길가에,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공원 산책로에, 대학교 교정에, 봄마다 벚꽃이 아름답게 피는 산기슭에 시비가 세워져 있지요. 서울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경치 좋고 볕 잘 드는 곳엔 시비가 있어요.
연세대 캠퍼스 내 '윤동주 문학동산'에 놓인 연세문학시비 (출처: 연합뉴스)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앞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있어요. 참회와 부끄러움 그리고 저항의 민족시인인 윤동주를 기리며 너른 캠퍼스에 약동하는 봄기운을 만끽해보죠. 시비 탐방 후엔 맛집이 즐비한 연남동으로 가요. 여러 집이 있지만 저는 망설임 없이 ‘감나무집 기사식당'으로 가 돼지불백과 고등어구이백반을 먹을 거예요.
성동구 한양대학교 교정에는 박목월의 ‘산도화' 시비가 있어요. 박목월 시인은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18년 동안 재직했는데, 교내 박물관을 비롯해 캠퍼스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시비 앞에 서서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마음을 씻었으면 행당시장으로 가볼까요. 돼지고기는 ‘땅코 참숯구이', 소고기는 ‘소나무집'이 끝내줍니다. 땅코에서는 목살을, 소나무집에서는 마늘양념 갈빗살을 먹어야 해요.
관악구 남현동 ‘예술인마을'에는 서정주 시인이 30년간 살았던 집 ‘봉산산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국화 옆에서'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친일 행적 때문인지 방문객이 드물어 한적한 것이 잠깐 앉아 있기 좋지요. 사당역 4번 출구로 가는 길 언덕배기에 있는 ‘명돼지갈비'는 개인적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숯불 돼지갈비 맛집이에요.
종로구 계동의 중앙고에는 이 학교 출신인 기형도의 ‘빈 집' 시비가 있어요.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를 읽었으면 삼청동으로 가야 해요. ‘삼청동수제비'에서 항아리수제비와 감자전을 먹고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단팥죽을 먹자고요.
북촌한옥마을과 정독도서관 일대를 걸으며 배를 꺼트린 후 ‘천진포자' 만두나 ‘경춘자의 라면땡기는날' 매운 라면까지 먹으면 성공적이죠.
기형도 시인이 유년기를 보낸 경기 광명시에도 광명 실내체육관 야외공원에 ‘어느 푸른 저녁' 시비가 세워져 있어요. 해가 길어진 요즘 어느 푸른 저녁에 시비 견학을 한 후 ‘정인면옥 평양냉면'에 가 평냉과 녹두전을 먹어요. 라스트오더는 저녁 8시 30분이에요.
이쯤 되면 시비 탐방보다 먹는 게 주된 목적입니다. 냉면 하니까 부천역의 ‘오박사냉면' 생각이 나요. 간판은 냉면집인데 돼지숯불구이로 유명하죠. 참, 부천 중앙공원에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인 정지용의 ‘고향' 시비가 있어요. 정지용의 고향인 옥천에는 정지용문학관이 있고, 곳곳에 지용의 시비가 세워져 있답니다. 옥천 ‘선광집'의 어탕국수와 도리뱅뱅이는 지용의 시 못지않게 아름답지요.
멀리 가볼까요? 전남 강진 김영랑 생가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있어요. 간 김에 ‘설성식당' 한정식을 꼭 먹어봅시다. 경남 통영 충렬사 앞에는 백석이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까인' 후 낮술 먹고 울면서 쓴 ‘통영 2' 시비가 세워져 있어요. 바로 옆 ‘충렬도너츠'에서 에피타이저로 도너츠 몇 개 집어먹고 서호시장 ‘만성복집'에 가 졸복국을 반드시 먹어야 해요.
충북 옥천 정지용 문학관 앞의 '향수' 조형물
시비는 주로 산에 많아요. 도봉구 북한산 생태탐방로에 김수영의 ‘풀' 시비가 있습니다. 정릉매표소 앞 ‘시골집연탄석쇠구이'는 북한산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닭백숙과 돼지석쇠구이를 먹을 수 있는 숨은 ‘찐맛집'이죠. 한편 4월 중순 남산 소월길에는 꽃송이가 주먹만 한 왕벚나무의 진분홍이 황홀해요.
남산도서관에서 김소월의 ‘산유화' 시비를 구경하고 그 유명한 '남산돈까스'를 먹기로 해요. 역시 남산 기슭인 동국대 중문에는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가 있어요. 시비와 눈 맞추고 충무로 ‘필동면옥'에 가 냉면육을 먹어야 합니다.
정작 목계장터는 시인의 고향인 충북 충주에 있어요. 남한강 목계교 건너 옛 목계나루터에 ‘목계장터' 시비가 있는데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라는 시구 그대로 민물 새우를 넣고 끓인 쏘가리 매운탕과 참마자조림이 압권인 ‘강변횟집'에 안 가고는 못 배겨요.
강원도 인제 만해마을에도 한용운 시비와 더불어 신경림의 ‘파장' 시비가 있어요. 황태덕장으로 유명한 인제 용대리에서도 손꼽는 황태요리 맛집은 ‘황태령'이에요. 황태해장국과 황태구이를 먹으면서, ‘파장'의 첫 구절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를 읊으며 내 앞의 정말 못난 친구와 서로 마주 볼 때 가슴이 웅장해져요. 긴 겨울 지나고 마침내 새봄, 하루 이틀쯤 시간을 내 시비 탐방을 핑계로 바람도 쐬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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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서시' 시비
윤동주 시인의 '서시' 시비를 보려면 연세대 신촌캠퍼스에 가야합니다.
시비가 있는 윤동주기념관은 연세대 중앙 부근에 위치합니다.
신촌역에서는 20분 정도 거리로, 활기찬 대학로의 기운을 바등며 걸을 수 있는 산책 코스이기도 합니다.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