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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1월 20일 월요일
서해에서 낚시를 하며 … 숭고한 석양을 낚았다
충남 태안, 보령, 서천을 지나 서해 리아스식 해안선을 오른쪽 옆구리에 낀 채 군산으로 가는 길, 가을빛으로 고즈넉한 하늘과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다. 만 나이로도 이제 마흔, 저기 넘실대는 건 내 청춘의 마지막 파도가 아닐까. 생일을 자축하러 가는 여행이 마치 한 시절과 작별하는 길처럼 애틋하다.
마음이 허전하면 몸도 헛헛해진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군산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에 개업해 79년째 영업 중이다. 시그니처인 단팥빵과 야채빵 그리고 오징어먹물소금빵을 사서는 바로 옆 이성당 카페에 가 아이스커피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 갓 구워낸 따뜻한 빵과 차가운 커피의 조합은 늘 옳다. 배고픔이 해소되자 마음의 허전함도 사라졌다. 나는 언제 상념에 빠졌었냐는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라는 인간이 이토록 단순하다.
이성당 바로 근처에 근대화거리가 있다. 근대화거리 초입에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배경인 초원사진관이 있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떠올리자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아기자기한 골목들과 일본식 가옥들을 지나다 보면 시간의 타래도 이리저리 뒤엉킨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의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서해안 황금어장을 차지하기 위해 군산에 일본인 주거지와 항만, 철도 시설을 지었다. 어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의 호황으로 부자가 된 일본인들은 이곳에 여관과 술집 등을 열었다. 1945년 패망 직후 그들은 떠났지만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동해도 근사하지만 때로는 서해만이 가진 '쓸쓸한 아름다움'이 사무치기도 한다. 고요하고 내밀한 휴식이 필요할 때면 나는 신선들이 노닐었다던 선유도로 간다. 16개 섬이 모여 있는 고군산군도의 섬 중 하나로 연륙교를 통해 육지에서 쉽게 갈 수 있다.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 해역은 그야말로 황금어장이다. 광어, 우럭, 농어, 삼치, 민어, 백조기, 참돔, 감성돔, 장대, 쥐노래미, 갑오징어, 주꾸미, 문어 등이 계절을 달리하며 낚시인과 행락객들의 손맛과 입맛을 돋운다. 낚시하기에 좋은 섬이지만 그냥 여행하기에도 아름다운 섬이다. 트레킹도 좋고, 캠핑을 즐기기에도 적합하다. 이날은 물고기보다 노을을 낚기로 했다. 동해에 장엄한 일출이 있다면 서해엔 숭고한 일몰이 있다. 숨을 들이마시니 노을이 함께 몸으로 들어온다. 나는 이런 노을을 마실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황홀한 금빛 석양 속에서 갈매기들이 역광의 그림자로 지워질 때, 노을을 사랑하는 사람은 노을의 일부가 되어 함께 아름다워진다.
파도 소리를 듣다 보니 노을이 있던 자리엔 어느새 쪽빛 어둠이 물들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면 몸속에도 바람이 든다. 배가 고프다는 얘기다. 이름도 정겨운 '토박이맛집'을 찾았다. 더 정겨운 이름의 '한세월토박이민박'과 함께 운영 중인 식당이다. 노부부께서 장사하는데 생선회와 바지락탕, 꽃게탕, 매운탕 등을 주력으로 한다. 꽃게탕과 생선구이 그리고 소라숙회를 주문했다. 제철 꽃게가 듬뿍 들어간 꽃게탕이 상에 오르자 친구와 나는 동시에 '우와' 하는 탄성을 뱉었다. 실팍한 꽃게에 살이 꽉 차다 못해 흘러넘쳤다. 이 통통한 살을 껍질에 가두느라 꽃게도 참 힘들었겠다. 쫄깃쫄깃 탱글탱글 살살 녹는 게살 맛에 취해 음미고 뭐고 허겁지겁 게 다리를 빨아 먹었다.
게살 한입 먹고 얼큰한 국물 한 숟갈 떠 먹으면 입안에서 불꽃축제가 열린듯 맛의 폭죽이 펑펑 터졌다. 생선구이와 소라숙회도 일품이고, 밑반찬도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맛이 좋았다.
파도 소리가 귓가에 자장가로 스며드는 한세월토박이민박집에서 노을빛 꿈을 꾸는 내내 뜨끈한 아랫목에 등허리가 갓 구운 빵처럼 노릇노릇 익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온돌방의 훈기가 반가운 계절, 군산에 가면 아랫목보다 더 뜨거운 노을이 있고, 노을보다 깊은 제철 해산물의 맛이 있고, 오늘을 겸손하게 돌아보게 하는 흘러간 시간의 흔적들이 있다. 그래, 가을엔 군산에 가야 한다.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