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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0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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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바람 맞으며 … 떠나자 고래바다로

사진설명

 

누군가 내게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란색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파란색 중에서도 어떤 파란색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바다의 파란색이라고 할 것이다. 세상의 그 많은 바다 중에서 어느 바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파란색을 지녔는지 궁금해 한다면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울진과 영덕 바다에 가보라고 말할 것이다.

'대진 지나 명사 이십리의 풍경이 관광엽서처럼 펼쳐'진 '울진을 지나 양정, 봉평해수욕장을 지난 다음 죽변'에 가야겠다. 경주에서 동해로 가는 윤대녕의 소설 '신라의 푸른 길'과 같은 방향으로, 청송에서 영덕을 거쳐 울진 죽변으로 향하는 길, 팔월의 태양이 맹렬하게 쏟아졌다.

축산항에서부터 고래불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은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차창 너머로 푸른 그림들이 늘어선 화랑이 열린다. 자연이라는 거장의 작품들. 해맞이공원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풍력발전단지의 거대한 풍차가 푸른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몸이 떠오르고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영덕 바다의 푸른빛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수평선 끝까지 날아가고 싶게 만드는 아득한 신비감과 황홀감이 있다. 푸른빛에 넋을 잃는 사이 고래불에 도착했다.


고래불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에 의해 붙여졌다. 어린 시절 산에 올랐다가 바다에서 고래들이 흰 물줄기를 뿜으며 뛰노는 모습을 보고 "고래불"이라고 외쳤다 한다. '불'은 '뻘'의 옛말로 고래불은 고래뻘, 즉 고래가 드나드는 해안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고래가 놀지 않는 해안,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고래불 바다는 언젠가 돌아올 범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를 향해 싱그러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영덕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대게지만, 먼 옛날 병곡 바다엔 대게만큼이나 고래가 우글거렸을 것이다. 그 많던 고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후포를 지나 울진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내륙으로 차를 몰아 금강송면 하원리로 갔다. 그곳에 부처의 그림자가 비치는 불영사가 있기 때문이다. 금강송면 하원리는 울진 바다로부터 불과 18㎞ 떨어져 있지만, 천축산 소나무 숲의 울울창창함이 바다를 잠시 잊게 만든다. 수만 년 솔잎을 삼켜 온몸이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불영사 계곡. 15㎞에 달하는 청동거울 물길은 웅장함과 세밀한 아름다움을 함께 뽐낸다. 불영사 진입로 구간에서는 물가로의 접근이 제한되지만 불영사 일주문을 나와 계곡 중류로 내려가면 누구나 그 차고 맑은 우주에서 탁족과 천렵을 즐길 수 있다.

불영사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절이다. 규모가 큰데도 관리가 잘돼 있는 점이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미관을 해치는 현수막이나 공사 자재는 볼 수 없었고, 나무와 꽃, 채마밭을 가꿔놓은 섬세함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두 번 놀라고 세 번째, 비구니 사찰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무릎을 쳤다. 구석구석 정갈함에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특히 불영사는 사찰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매년 가을마다 사찰음식축제를 열어 사람들에게 건강한 자연 밥상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불영사에선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음식을 만드는데, 김치와 된장은 속인(俗人)들이 그 비법을 탐낼 정도라고 한다. 이번엔 맛보지 못하고 일주문을 나서지만, '다음엔 꼭 먹어보리라.' 다짐했다.

천축산 숲그늘에서 나와 다시 바다로 향했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라고 노래한, '하늘의 끝' 같은 바다가 울진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동해다. 망양정에서 망망대해를 보며 정철은 '세상의 끝', 즉 우주와 저승에 대한 상상을 했던 것이다. 망양정에 오르니 파도가 끊임없이 소나무 향기를 밀어 올렸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향기에 취했을까? 아무리 눈을 씻어도 수평선이 희미했다. 어느 것이 바다고 어느 것이 하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19년 전 스무 살 여름, 학과에서 망양정으로 '신라의 푸른 길'이라는 문학 답사 기행을 왔다. 푸른 바다 앞에서 그 아이의 웃음은 더 눈부셨다. 그때 사랑했던 여학생은 지금 두 딸의 엄마가 됐다. 내가 정말 그 시간을 살았었나? 모든 게 꿈만 같다. 망양정 너머 동해의 부윰한 물금이 마음으로 스며들 때 비로소 알았다. 사랑과 미움이 한 몸이라는 것을, 그리움과 기다림도, 어제와 오늘도, 삶과 꿈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