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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0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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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우리가 잃어버린 여름이 있다

사진설명

강원도 양양 어성전 계곡

어떤 계절을 좋아하느냐고 누가 물을 때마다 여름이라고 답하곤 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낮을 늘여놓으면 길어진 빛의 상영시간 속에서 여름은 영화처럼, 나는 주인공처럼 뜨겁고 찬란하게 행복했다. 그 기억들에서 감각되는 여름의 뜨거움은 따갑고 쨍하지만 쾌청한 데가 있어서 마치 고온건조된 빨래처럼 바삭하면서도 가벼운 느낌이었다. 영화 '그랑블루'의 파랑과 '기쿠지로의 여름'의 초록 사이에 내가 사랑하는 칠월과 팔월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기억 속 여름과 실제 체감되는 여름은 다른 계절이다. 아열대화로 인해 더위의 형식이 바뀌었다. 뜨거워도 가볍고 산뜻했던 대기가 요즘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축 늘어진다. 물컹하고 흐물흐물하고 끈적거린다. 밖에 나가 30초만 서 있어도 습식사우나를 할 수 있다. 덩달아 수온도 올라 동해에 거대 독성 해파리들이 출몰했다. 8월 초 서해 격포 바다에 낚시하러 가서 보니 기온이 31도인데 수온이 32도다. 나는 내가 사랑한 여름을 잃어버렸다.

이번 여행의 목표를 '잃어버린 여름을 찾아서'로 정했다. 파랑과 초록 그리고 투명한 여름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삼복더위의 한복판에서 나는 어느새 강원도 양양으로 가고 있었다. 젊은 남녀들의 '헌팅 성지'가 되어버린 양양 해변은 시끄럽고 볼썽사나울 뿐이다. 양양의 진짜 매력은 울울창창한 계곡에 있고, 거기엔 아직 아열대의 입김이 닿지 못한 산뜻한 여름이 반짝이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백두대간 오대산 해발 1422m 두로봉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흐르는 남대천,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물빛은 물고기가 밭을 이룰 정도로 많다는 어성전부터 불가의 법문처럼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법수치까지 흐르고 있다.

물가를 무단으로 점령한 평상과 파라솔, 백숙을 강매하는 호객꾼들 따위 추잡한 풍경 없이 고요하고 수수하게 흐르는 어성전계곡에 발을 담갔다. 발을 담그자마자 몸속에 파랑 초록 스위치가 한꺼번에 켜졌다. 적당히 차가워 자맥질하기 딱 좋은 물속으로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 잠수했다. 바다 스노클링과는 전혀 다른 수중 세계가 펼쳐졌다. 형형색색 화려한 바닷속에 비해 소박하지만 어성전계곡은 산천어, 돌고기, 모래무지, 참마자, 피라미 등 별사탕 같은 물고기들이 은빛 반짝임을 가득 뿌려놓은 꿈결이었다.

바위에 올라 깊은 물로 다이빙하니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가 다 날아갔다. 파리올림픽에 출전한 다이빙 선수 흉내를 내봤지만 배부터 떨어져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고 물보라보다 더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자두와 복숭아를 베어 물며 족대로 물과 초록과 바람을 건지면 햇빛과 물방울이 일으키는 마찰에서 애완 무지개들이 태어났다. 나와 친구는 무지개 한 마리씩 어깨에 얹고 물고기 모양의 낭만을 잡았다. 말랑말랑한 발바닥을 간질이며 물고기들은 빠져나가도 오래 잃어버린 여름을 되찾은 기쁨에 미소 지었다. 못 잡은 물고기는 통발이 잡아주리라. 미끼를 넣은 통발을 던져두고 펜션에 와 낮잠을 잤다. 여름 계곡 물놀이 후 낮잠만큼 다디달고 다디단 것은 없다.

낮잠에서 깨도 여전히 환한 여름이 자두 빛깔로 익어가고 있었다. 낮잠 자는 사이 냄비 속 큼지막한 토종닭도 어느새 맛있어졌다. 닭다리 좌악 뜯어 한입 크게 우물거리자 행복한 여름은 이제 영영 나를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노을의 시선 강탈과 계곡 물소리의 ASMR은 그 어떤 유튜브 영상보다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나는 온 맘 다해 어성전계곡에 '좋아요'를 누르고 이곳의 아름다움을 구독하기로 했다.


물에는 어성전(魚成田), 하늘에는 성전(星田)이다. 밤이 되자 별밭이 펼쳐졌다. 은하수 수놓인 밤하늘 아래 별빛을 받아먹은 계곡물이 교교히 흐르고, 줄을 당겨보니 통발 속에는 산메기와 동자개, 피라미, 갈겨니가 가득했다. 천렵 후에 끓여먹는 매운탕과 어죽은 여름 계곡 피서만의 낭만이다.

다음날 산새들과 매미들과 계곡물소리의 아카펠라를 들으며 기지개를 켰다. 이번 여름 가장 개운한 아침이었다. 4일과 9일에 서는 양양오일장을 찾았다. 감자옹심이와 감자전과 콩국수를 친구와 나눠 먹으며,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말했다. 여름을 좋아한다고. 이런 여름 안에서라면 나는 언제까지나 소년이다. 여름이 변함없듯 소년도 늙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