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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03일 목요일

기고·인터뷰 이슈 따라잡기

인생은 순간이다,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2024년 가장 힙한 어른
야신 김성근 감독과 조우
'업'의 진심전력을 넘어
'매 순간' 진심전력 다하다

 

사진설명
김성근 감독의 메모.

 

최근 모 기업 강연에서 김성근 야구 감독님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주최 측에서 둘 간의 대화 호흡을 위해 사전 만남을 계획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강연 당일 같은 차량으로 둘을 이동시키는 차선을 택했다. 이번 '노가영의 문화 뒤집기'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어른' 김성근과의 소소한 기록이다.

 

나는 JTBC '최강야구' 프로그램을 통해 야구를 배웠다. 사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평생 야구와 담을 쌓아왔던 '야알못'(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을 비꼬는 말)들이 최강야구 직관표을 구하려 애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평생 '야알못'으로 살아온 나 같은 사람들이 김성근 감독의 다이아몬드 내야 그라운드를 통해 야구의 재미를 알게 된 셈이다. 더 정확히는 인생의 매 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매 순간 진심과 전력을 다하는 법을 배웠다.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나는 미리 태블릿에 저장해왔던 자료들을 감독님께 '쓱' 들이밀었다. 전문 강연자가 아닌 감독님을 위해 감독님이 쓰신 책 '인생은 순간이다'를 읽고 사부작사부작 만들어본 강연 자료였다. 남의 책을 읽고 남의 강연 자료를 대신 만든 이례적인 오지랖을 떤 것이다. 옅은 웃음을 짓던 감독님은 "그냥 내 스타일대로 하겠다"고 하시면서도 혹여나 내가 무안해할까봐 이런저런 말씀을 건네셨다. 감독님의 강연은 전문 강연인처럼 유려하진 않았지만 감독님의 진심과 기업 임직원들 간에 이해와 존경이 오가는 따뜻한 자리였다.

 

사진설명
김성근 감독의 메모.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나지막이 말씀을 건네셨다. "노 작가가 내 예상보다 (무대에) 일찍 올라와서 내가 답답하게 했구나 싶었어." "말이 잘 안 나왔어." 열심히 준비해온 말씀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것을 혼자 반추하고 계셨던 것이다. 강연장에 갑자기 의자가 제공되니 평상시 루틴이 깨지셨다는 말씀도 더하셨다. 지극히 야구선수다운 징크스다. 난 감독님이 더 이상 곱씹지 않으시도록 책과 메모, 야구에 관한 소소한 질문들을 이어갔다. 이런저런 대화들을 주고받던 중 감독님이 스스로 메모하지 않으면 '지금의 움직임'(시대의 빠른 변화로 해석된다)을 못 따라간다고 하시며 가방에서 일본어로 적은 빼곡한 노트를 꺼내 한 문장씩 꼼꼼히 설명해주셨다. '인간은 어려울 때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어려울 때에도 길이 있고 밝을 때에도 산이 있다.' 무슨 메모들인지 여쭈었더니 오늘 어떤 강연을 해야 할지 삼 일 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정리하셨다고 한다. 전문 강연자로 살아가는 내게 진심전력을 더하라며 뒤통수를 한 방 후려치신 느낌이었다.

 

60년 야구 인생, 55년의 지도자 생활, 여든셋의 나이. 대한민국 최장수 야구감독이자 최강 몬스터즈의 현역 감독인 야신 김성근이다. 대한민국의 모두는 그가 진심전력(盡心專力)을 다하는 것은 그의 '업(業·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기간 계속 종사하는 일)'인 야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른이 진심전력을 다하는 것은 업이 아닌 인생의 매 순간이었다. 야구는 내 업이니 진심전력을 다하고, 남의 시간을 빌리는 강연은 내 업이 아니니 더 진심전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감독님이 책에서 언급하셨듯 공 하나에 다음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 도착한 후 종일 굶은 우리는 감독님 동네의 돼지갈비 집에서 배를 채웠다. 근처 감독님 댁까지 걸어가는 길은 고작 이삼백 m 정도의 짧은 거리였으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성수동 거리에서 젊은이들은 저 멀리서도 모습을 알아보고 '최강야구 감독님이다!'를 외치며 달려와 사진을 부탁했다. 그렇게 감독님은 연이어 달려오는 젠지세대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진에 응해주셨다. 미디어에 노출된 근엄한 표정이 아닌 따뜻한 어른의 표정으로 젊은이들을 대하셨다. 그날 대낮의 성수동 거리에서 그는 K아이돌이었고 난 매니저였다.

 

감독님의 진심전력은 어떻게 공감을 얻을까.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왜 그에게 위로받을까. 세상이 녹록지 않아 늘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할 때, 큰 어른이 곁에 있는 것 같은 든든함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동시대에 좋은 어른이 함께 살아 간다는 건 비록 내 손에 닿지 않는 거리일지라도 위로가 된다. 여든셋의 나이에도 매 순간 전력투구하는 그의 태도에서 어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