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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03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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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도 살아있네, 한국 로코의 '감칠맛'

시청률 25%로 종영한
김수현 주연 '눈물의 여왕'
여성이 실질적 주인공인
K로코 공식 그대로 따라
전세계 시청자들 열광
 
사진설명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이 25%라는 압도적인 시청률로 종영했다. 최근 몇 년간의 흥행 드라마인 '킹더랜드'(13.8%), '사랑의 불시착'(21%)을 훌쩍 넘어서는 비현실적인 시청률이다. 여전히 한류 아이콘으로 인식되고 있는 2014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25%를 찍긴 했지만, 당시는 드라마를 시청하는 채널이 지상파와 종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유튜브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스트리밍이 지배하는 2024년에 TV 시청률 25%는 곱씹어 볼 만한 기록이다. 기존의 성공 드라마 법칙을 답습했다는 평도 있으나, 대한민국이 두 달여간 '눈물의 여왕'을 실시간으로 시청하며 울고 웃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넷플릭스를 통해 K드라마가 전 세계에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한국 로맨틱 코미디'(이하 '한국 로코')는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명확한 정체성을 확립해왔다.

2010년대 중반 즈음이다. 한국에 방문한 모 할리우드 스튜디오 임원이 '한국 로코'가 북미 시장과 다르게 흥미로운 특징을 갖고 있다며 열변을 토하던 기억이 있다. "한국 로코는 '슈퍼 파워'를 갖고 있는 남성이 세속적인 기준에서 경제적으로, 외모적으로, 성격적으로 부족함이 있는 여성을 무한대로 지켜준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로코의 사실상 주인공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봐야 한다." 2003년 '옥탑방 고양이', 2004년 '풀하우스',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 등이 유사한 세계관을 따르고 있었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킹더랜드' '사랑의 불시착' 그리고 시청률 25%를 만들어낸 최근의 '눈물의 여왕'까지 일관되게 이 계보를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동남아에서는 '한국 로코'가 하나의 장르가 되어 'K로맨스' 포맷을 차용하는 제작사들이 생겨났다는 점도 흥미롭다.

왜 '한국 로코'는 이러한 세계관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공급자 관점에서만 보면, 미국 시장에 비해 여성 작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보니 여성 중심 판타지가 그려졌을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신데렐라 세계관은 식상하지만, 여성 작가들의 현실적인 디테일에, 매번 설득당하고 중독된다. 여성들이 여성들의 판타지와 욕망을 충실히 그려내는 셈이다. '눈물의 여왕'의 네이버 오픈토크에서 폭풍처럼 쏟아지는 대화 중 시도 때도 없이 가장 많이 튀어나오는 질문도 "백현우 같은 남자가 있을까요?"다. '한국 로코'의 남자 주인공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가 아니다. '현실에서 나만을 도와주는' 내 주위 남성이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내 주위에 있을 것 같다는 건 모두에게 치명적인 환상을 선사한다. 여성 시청자들이 '한국 로코'를 멈출 수 없는 명쾌한 이유다.

이쯤 하면, 한국 드라마 산업에서 성공한 작가 중 여성 비율이 많은 이유도 궁금하다. '한국 로코'는 언제부터 여성 중심 스토리텔링으로 자리 잡았을까. 여러 가설이 가능하다. 과거 방송작가의 대우가 열악해 가장의 위치에 있던 남성이 이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혹은 한국 드라마는 할리우드처럼 드라마 메인작가가 프로듀서와 제작 책임을 겸하는 '쇼러너'가 아닌 '글' 중심이라 남성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던 걸까. 물론 과거 시점 분석이다.


이 중 가장 흥미로운 가설은 TV 채널권에 대한 담론이다. 과거 한국의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아버지들은 늘 늦게 귀가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아들이, 남편이 밥벌이를 떠난 후 아침 시간대 또는 모락모락 저녁밥을 함께 지으며 유독 드라마 이야기를 할 때만 합이 척척 맞았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TV 채널권'은 여성들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미국 드라마는 블록버스터와 온 가족이 함께 보는 가족 프로그램 위주다. 스케일이 큰 액션이나 전쟁, 슈퍼 히어로, 어드벤처, SF이거나 가족 코미디였다. 당연히 주 시청자는 20~40대 남성과 가족층이다. 오죽하면 넷플릭스의 출현 전까지 미국 홈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지배하던 비디오·DVD 대여 전문점 이름도 '블록버스터'였을까.

한국 드라마는 여성에서 출발해 온 시장이다. 2010년 이후 여성 작가들이 다양한 장르로 확장했고, 2020년대 들어 OTT 중심의 다양한 플랫폼에 선 굵은 대형 작품들을 공급하며 성별에 따른 장르 구분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눈물의 여왕'에 구현된 '한국 로코'의 전통적 세계관은 2024년에도 여전히 통하며, 손에 잡힐 것 같은 판타지로 현실의 순간들을 위로한다. 미워하기 어려운, 여전히 감칠맛 나는 '한국 로코'의 경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