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 프랑크푸르트 헤센한국학원장
등록 2023-05-04 15:10teen.mk.co.kr
2025년 03월 28일 금요일
나토 들어가려는 스웨덴, 중립국 지위 누리며 번영
김영주 프랑크푸르트 헤센한국학원장
등록 2023-05-04 15:10작년 나토 가입 신청하며
74년만에 군사중립국 포기
19세기부터 열강에 밀리며
반강제로 중립국 지위 선택
발렌베리 가문의 성장으로
스웨덴 경제도 차츰 살아나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지난해 5월 스웨덴과 핀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동안 스웨덴은 전시에는 중립, 평시에는 비동맹중립이라는 원칙을 표방했지만 좌파연합의 마그달레나 안데르손 내각은 74년 만에 군사중립국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나토 가입은 30개 회원국의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한데 튀르키예와 헝가리가 스웨덴의 가입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작년 10월 총선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태극기 부대 격인 스웨덴민주당(SD)이 원내 제2당으로 약진한 결과 우파연합 내각이 출범했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총리도 나토 가입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의 아니었던 중립
스웨덴이 오늘날처럼 유럽의 약소국이 된 것은 1809년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 패배한 뒤부터다. 전쟁 대가로 스웨덴은 핀란드를 잃으면서 왕조까지 교체됐다. 대륙에서 영향력을 잃은 스웨덴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안으로 수축됐고 현재 서울 인구 규모의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은 스웨덴이 약소국이라는 것을 유럽에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혜성처럼 등장했던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아무런 국제적 행동도 시도하지 못 했다. 프로이센의 전격전은 덴마크를 완벽하게 제압했고, 윌란 반도 안으로 완전히 밀어넣었다. 이렇게 스웨덴은 적극적인 중립국이라기보다 타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완충국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됐다.
'발렌베리' 가문의 등장
혼란기를 거치며 스웨덴의 삼성 격인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이 스웨덴을 장악한다. 아버지가 린셰핑 대주교였기에 부유했던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미국 체류 시기에 1837년 경제 공황을 목격했다. 1830년대까지 미국 자본가들은 목화를 담보로 영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서부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목화 가격 급락과 영국의 대출 제한으로 미국의 850개 은행 중 343개가 문을 닫았다.
앙드레는 스웨덴으로 돌아갔고 37세에 신분제 지역의회 의원이 됐다. 그는 토호나 장사꾼과 인맥을 쌓아 1857년 스톡홀름 개인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경제 공황을 거울삼아 사채 발행이 아니라 예금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개인 은행을 기획했는데 우편환이나 무이자 약속어음을 소개하면서 스웨덴 금융시장의 총아로 떠올랐다.
일상적이었던 빈곤
19세기 후반 스웨덴의 연대기에도 극심한 빈곤과 대이민이 기록돼 있다. 스웨덴에는 적어도 13세기부터 '로테공(Rotegang)'이라는 농촌공동체 관습이 있었다. 교구가 관리하는 빈민 구제책으로 6가구가 1로테(rote)로 묶여 빈민 가정이 그 안을 돌며 숙식을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파티가욱훈(fattigauktion)'은 말 그대로 빈자 경매인데 1년 단위로 교구 안에서 노동력으로 활용할 빈자(가난한 사람)를 사고팔던 관습이었다. 스웨덴에 키루나 철광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시작됐지만 인구의 거의 90%가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소한의 난방으로 영양실조 속에 살았다. 1918년 아동 경매가 금지되기는 했지만 스웨덴이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고아들을 많이 입양했던 것도 빈자 경매 문화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증거다.
1867년 기록적인 대흉년 때는 밀가루의 3분의 1과 이끼의 3분의 2로 껍질빵과 죽을 만들어 먹으며 버텼기 때문에 그해를 '이끼의 해'라고 부른다.
독일의 협력업체라는 운명
독일은 프로이센이 중심이 된 북(北)독일연방 시절부터 눈에 띄는 경제성장을 보여주었다. 스웨덴은 이 시기 독일의 협력업체로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통일된 독일제국이 1880년대에 회사 난립시대에 들어서고 본격적으로 유럽의 공장이 되면서 스웨덴의 산업화에도 가속이 붙는다.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 기업들과 독일 투자의 창구가 되었고 자금 흐름을 장악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스웨덴은 중립을 선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대륙의 교전국들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스웨덴에서 군화부터 식품과 철강까지 수입하게 됐다. 스웨덴의 수출량은 1910~1915년 50% 증가한 후 약간 감소했지만 가격 상승 호재로 같은 기간에 수익은 300%나 늘었다.
그러나 1916년부터 서부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영국의 해상 봉쇄가 확실해지면서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개시했다. 중립국 선박도 공격 대상이 되었고 이는 독일에서 코크스와 석탄은 물론 곡물 수입이 차단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평화 논의가 시작되면서 스웨덴 기업들의 전쟁 유가증권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독일 경제 의존도가 높은 스웨덴 경제의 특성상 불황도 빨리 왔다.
양다리 중립이 가져온 번영
나치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켰을 때 야콥이 발렌베리 가문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스웨덴·독일 무역협상과 스웨덴·영국 무역협상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으로 양쪽을 돕는 중립을 모색했다.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어정쩡한 중립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은밀히 양쪽을 고객으로 두었다.
지금은 발렌베리 가문 계열사들이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발렌베리 가문이 곧 스웨덴이었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고 재무장을 시작한 1933년부터 6년 동안 협력업체 스웨덴은 호황을 맞는다. 선진국 평균의 80%에 불과했던 스웨덴의 1인당 GDP는 이 시기를 거치며 거의 95%까지 육박하게 된다. 스웨덴은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할 때 철도를 빌려줬고, 키루나의 철광석을 노르웨이 나르비크 항구를 통해 독일 군수산업에 공급했다. 발렌베리 가문의 장기인 금융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소유한 통신사 에릭슨, 볼베어링의 SKF, 볼보와 사브의 전투기·군용차량 엔진 등이 나치 독일을 위해, 그리고 나중에는 영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미국과 서유럽을 살린 한국전쟁의 호황이 스웨덴에 선진국 지위를 안겨주었다. 스웨덴은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스웨덴 기업들은 전범기업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