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5년 02월 13일 목요일

기고·인터뷰

기고·인터뷰 이슈 따라잡기

총천연색 함백산 올라 … 마음의 먼지 털어냈다

강원 정선
함백산.
함백산.

 



세상에서 버텨내려 안간힘을 쓰는 내가 불쌍할 때면 강원도에 가야 한다.

"영리함이 한계를 넘어서면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던 조르조 아감벤의 말처럼, 대도시의 세속적 욕망이 임계점을 넘어선 시대에 나는 어리석게 보일 만큼 단순한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도시적 가치관이 규정하고 있는 어리석음이란 사실 정직함, 순수함, 느림, 맑음 같은 것들이 아닐까.

겨울 강원도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정한 곳이다. 묵묵한 폭설 속에 고요는 더욱 깊어지고, 풍경은 마치 얼음에 갇혀 멈춘 듯하다. 세속의 추위를 피해 더 추운 곳으로 가는 이의 마음을 차고 맑은 눈꽃으로 밝혀주는 강원도에 가야겠다.

강원도에서도 가장 말없이 순박한 땅은 정선이다. 장쾌한 바람으로 마음에 낀 먼지를 먼저 날리기 위해 나는 정선과 태백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함백산에 오른다. 해발 1572m의 함백산은 백두대간 태백산맥 봉우리 중 하나로 호방한 위엄을 자랑한다. 1960년대 우리나라 탄광업이 호황을 누릴 때엔 전국 석탄 생산량의 30%가 함백산 탄광에서 채굴됐다. 그때 탄광이 무너져 광부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더러 생기자 광부의 가족들은 함백산 기원단에서 무사 안전을 빌었다.

 

예부터 함백산 기원단은 하늘에 소원을 빌던 민간신앙의 성지라고 한다. 1500m급 고봉인데도 만항재 기슭에 '하늘 아래 첫 마을' 만항마을이 있는 덕분에 도로를 이용해 1300m 고지까지 오를 수 있다. 정상까지 오르는 여러 코스가 있지만, 평소 등산을 잘 하지 않는 나로서는 장거리 코스가 부담스럽다. 봄산이나 가을산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등산화도, 아이젠도 없는 내게 설산은 더욱 무리였다. 차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1300m 고지의 KBS 중계소 부근까지 차를 몰고 간 다음 거기서부터 천천히 걸어 올랐다. 흰 눈을 이불처럼 덮은 산은 차디찬 푸른 하늘과 그 색채가 대비되며 총천연색을 뽐냈다. 우듬지마다 피어 있는 얼음 눈꽃이 아름다웠다. 벌떼처럼 맹렬한 눈발의 날갯짓에 귀를 달래며 쉬엄쉬엄, 40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1500m 고봉을 40분 만에 오르다니, 이런 가성비 등산이 또 있을까. 함백산 꼭대기 바람이 얼마나 센지, 거구인 나마저도 정말 날아가는 줄 알았다. 사진을 찍다가 스마트폰을 놓칠 뻔했는데, 놓쳤다면 아마 종이비행기처럼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두 뺨을 마구 후려치는 태백산맥의 찬바람이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졌다. 도시 생활에서 답답하게 막혔던 마음의 창문을 시원하게 열어준 까닭이다. 고작 40분 걸어 올라간 산에서 친구와 나는 전문 산악인인 양 허세를 부리며 사진을 찍었다. 그마저도 함백산의 넉넉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불과 한 시간 만에 1572m 고산을 오르내렸는데 그것도 등산이라고 허기가 졌다.

 

정선 읍내로 향했다. 강원도 토속음식이 먹고 싶었다. 정선 아리랑시장 '팔도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배추전, 수수부꾸미, 메밀전병, 빈대떡과 산초두부, 콧등치기국수까지 푸짐하게 먹었다. 자극적인 조리법 없이 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린 자연친화적 음식은 인스턴트와 배달 음식에 지쳤던 나에게 산뜻한 축복이 되었다. 하룻밤 묵어갈 곳은 고려 말기에 지어진 고택 상유재(桑惟齋)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9호인 이 오래된 집에는 수령이 600년 넘는 뽕나무가 있다. 뽕나무 상(桑)과 생각할 유(惟)를 써서 상유재, 즉 뽕나무를 생각하는 집이자 뽕나무처럼 생각하는 집이다. 600년을 살아온 뽕나무의 느긋한 지혜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자 한 시간짜리 속성 등산이 더 우습게 느껴졌다.

 

댓돌 위 고무신 옆에 운동화를 벗어두고, 창호지 문틈으로 겨울바람이 들어왔다 나가는 방에 이불을 깔았다. 뜨끈한 아랫목에 등을 대고 누우니 겨울바람에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뽀송하게 마르는 듯했다. 밖은 바람 소리 매서웠지만 꿈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뽕나무를 생각하는 방 안에서 자꾸만 뽕 뽕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아니다. 투박하지만 따스한 풍경, 억세지만 정직한 음식들, 뽕나무처럼 느리게 사는 사람들. 겨울인데 마음이 따스했다. 겨울에 봄을 느끼게 해주는 강원도의 넉넉한 품속에서 밤은 오래도록 다정했다. 나는 정선 출신 전윤호 시인의 시를 외우면서, 살다가 언젠가 또 무심코 정선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틴매경
구독 신청
매경TEST
시험접수
매테나
매경
취업스쿨
매일경제
경제경영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