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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06일 토요일

우리가 함께 만드는 '사랑의 원주율'

이병철 시인

입력 2025-03-3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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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를 받았다

피를 뽑고 약해질 때마다

착해지는 기분이 된다

 

피주머니가 빵봉지처럼 부풀어 오르는 동안

원의 둘레를 재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무수한 직선들을 잇고 이어서

곡선을 만들었을 수학자에 대해

사실 휘어짐이란 착시일 뿐이라고

 

뼈의 모양은 직선이지만 서로의 뼈를 비스듬히 잇고

뼈를 또 잇고

이어서

둥그런 원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솜으로 막아 피를 굳게 하는 동안엔

모두가 조금씩만 아파주면

한 사람은 전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

 

초코파이와 오렌지주스는 맛있고 누군가는

상냥했다

상냥한 사람이 되기까지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다

 

헌혈의 집을 나서자

파이가 빨간 비닐을 벗으며 둥그렇게 떠오르고 있고

 

그 속으로 역광을 만들며 걸어가는 사람들

인간의 모양이 휘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한 사람을 위해 팔을 꺾는 사람들과 있었다

우리가 햇볕 속에 함께 있음을

무수한 뼈를 엮어 만든 포옹이라 느낄 때

지평선은 물결이 되어

일렁거리고

 

이제 바늘자국을 만져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돌고

돌아서

나의 차례였다

 

 

―조온윤, '원주율'

(시집 '햇볕 쬐기' 창비 펴냄, 2022)

 

 

시집 ‘햇볕 쬐기'. (출처: 연합뉴스)

 

 

———————————————

 

 

타인에 대한 혐오와 편 가르기, 양극화 갈등, 이기주의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 잘 살면 그만인 세상, 혼자 독차지할 수 있는데도 자기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타인과 더불어 누리는 일은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빵 한 쪽, 물 한 모금, 돈 몇 푼도 아까운데 하물며 피는 어떻겠어요?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피를 나누는 행위는 그래서 정말이지 숭고합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헌혈

헌혈. (출처: 연합뉴스)

 

헌혈자에게 '초코파이'를 주는 것은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소모된 기력을 빵으로 보충하라는 뜻이지요. 헌혈자가 피를 내어주고 빵을 받을 때, 피와 빵 사이에는 등가가 성립됩니다. 위 시는 그 등가의 상상력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화자는 헌혈을 하는 동안 "원의 둘레를 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직선과 곡선, 휘어짐의 착시, '뼈의 모양'에까지 사유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이 사유의 비약적 전개는 "피주머니가 빵봉지처럼 부풀어 오르는" 곡선 운동의 관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화자가 말했듯 "사실 휘어짐이란 착시일 뿐"이지요. 지구는 등속직선 운동을 하지만 태양의 중력으로 인해 휘어진 시공간을 따라 변속곡선 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무수한 직선들'이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본래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어진 두 직선이 있다고 해봅시다. 두 직선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땐 평행선이 되어 닿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땐 극과 극으로 영영 멀어집니다. 두 직선이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수직과 수평의 교차뿐인데, 이는 한순간 서로를 고통스럽게 뚫어 관통할 뿐 끝내 각기 다른 지점으로 뻗어가고야 말지요.

 

화자가 "뼈의 모양은 직선"이라고 했을 때, 직선은 인간이 지닌 본래의 운동 상태가 됩니다. 인간은 직선으로 뻗어나가며 경쟁하고, 양 극단으로 달리고, 날카로운 창처럼 서로를 찌르는 관성을 지녔습니다. 시인은 이 각자도생의 이기적 인간 사회를 폭력의 세계로 규정합니다.

 

시인은 직선의 폭력을 극복하는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서로의 뼈를 비스듬히 잇고 뼈를 또 잇고 이어서 둥그런 원을 만드"는 것입니다. 원을 만들면 서로 닿을 수 있지요. "무수한 뼈를 엮어 만든 포옹" "우리가 햇볕 속에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타자를 안아주는 포옹은 물론이고, 헌혈 또한 '뼈를 이어 원을 만드는' 이타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헌혈은 ''를 통해 나와 타자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하고, 내 생명의 일부를 내어줌으로써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희생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조금씩만 아파주"는 이 희생으로 인해 "한 사람은 전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화자가 "바늘자국을 만져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 "돌고 돌아서 나의 차례", 즉 그 '조금씩만'의 희생을 이제 그가 타자로부터 받게 된 까닭이지요.

 

서로의 뼈를 잇고 이어서 만든 둥그런 원에는 원주율이 존재합니다. 이 원주율 '파이(π)'는 끝이 없는 무리수이자 초월수입니다. 가장 완전한 형태인 원을 이루는 질서인 이타적 사랑과 희생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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