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입력 2026-02-19 09:55teen.mk.co.kr
2026년 05월 11일 월요일
조선시대에 절약보다 소비 강조한 실학자 박제가

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입력 2026-02-19 09:55
…… 재물은 우물과 같다. 쓸수록 자꾸 가득 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을 입지 않으면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사라진다.……농사도 방법을 몰라서 흉년이 자주 들고 장사도 물건을 팔 줄 몰라서 이익이 남질 않는다. ……
'북학의'
![북학의 표지 [국가유산청 제공.연합뉴스]](https://cms.mk.co.kr/cms/v1/storage/content/view/news-p.v1.20260126.bfaacd2a7f1a4625ba3045d85907ad58.png/t2)
북학의 표지 [국가유산청 제공.연합뉴스]
조선 실학자 박제가는 재물을 우물에 비유하며 '소비'를 강조했습니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조선에서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소비를 장려하자'는 그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박제가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1750년 박제가는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던 명문가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부승지 박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박제가는 글 읽기를 좋아했고 시와 그림에도 능했다고 합니다. 10세 때 이미 대학, 맹자, 시경 등 유교 경전을 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박제가는 당시 차별받던 '서얼'이었습니다. 서얼은 조선시대 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서얼은 가장 중요한 과거 시험인 문과 응시도 안 되고 사회적으로도 큰 차별을 받았습니다. 실학자 유형원이 쓴 '반계수록'에 따르면 "서얼은 본부인의 자녀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반말을 못 했고 말을 타고 가다가 만나면 말에서 내린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서얼의 차별을 경험한 박제가는 당연히 조선의 양반제도와 사회 모순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는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양반이 너무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훗날 정조에게 쓴 상소문을 보면 "과거에 응시하러 오는 자가 10만명이 넘는데 이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1768년 박제가는 운명적 만남을 경험합니다. 사실상 자신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자 박지원을 처음 만난 것입니다. 또한 같은 서얼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유득공, 이덕무 등도 만나며 함께 공부합니다.
1778년 박제가는 친구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로 떠나는 사절단에 합류합니다. 석 달 동안 청나라를 돌아다녔던 그는 많은 것을 깨닫고 조선으로 돌아와 유명한 '북학의'를 집필했습니다. 사람들이 오랑캐라고 했던 청나라의 발전을 직접 경험한 박제가는 적극적으로 청나라 문물을 수용하자는 '북학파'가 됩니다.
박제가는 '수레의 사용'을 많이 강조합니다. "수레를 이용해 온갖 물건을 싣기 때문에 이보다 더 이로운 도구가 없다"고 책에 적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산과 강이 많아 수레가 다닐 만큼 넓은 길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짐을 들고 다니는 보부상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박제가는 보부상이 옮기는 양으로는 장사의 이윤을 극대화할 수 없음을 깨닫고 수레를 통해 상업의 발달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박제가는 작은 나라 조선의 부국강병은 교역을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과도 일치되는 분석입니다.
박제가는 절약을 미덕으로 여기던 당시 사회에 반대로 '소비'를 강조했습니다. '소비는 재생산을 자극하는 것'이라며 상업이 발달하면 농업과 수공업도 덩달아 발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장사하는 상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비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강조한 박제가의 생각은 요즘 뉴스에 나오는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화폐 장려를 많이 생각나게 합니다.
1777년 조선 임금 정조는 서얼의 과거 응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서얼 허통'을 발표합니다. 박제가도 그 혜택을 보고 과거에 합격해 1779년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초대 검서관이 되었습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만드는 책을 검토하고 교정하는 관직입니다.
박제가는 규장각에서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밤새 규장각에서 책을 읽다가 잠든 그에게 정조가 자신의 이불을 덮어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박제가는 정조를 믿고 '상공업 장려, 신분 차별 타파, 해외 교역, 서양 선교사 초청, 과학기자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을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건의는 당시 양반 지배층의 분노와 견제를 받았고 정조가 죽은 뒤 박제가가 역모 사건으로 유배되는 이유가 됩니다. 정조가 죽고 몇 년 뒤 그의 개혁에 앞장섰던 서얼 출신 실학자 박제가 역시 죽습니다.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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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
청의 문물 수용과 상공업 장려를 강조한 실학자들.
규장각
원래 왕실도서관이었으나 정조 때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학술기관으로 발전.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