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입력 2025-04-21 09:10teen.mk.co.kr
2025년 12월 06일 토요일
고려 군대의 힘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

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입력 2025-04-21 09:10"왜변이 일어나면서 성읍(城邑)이 빈터가 되고 살림집들이 불타 없어졌다.
그 결과 수년간 버려져 왜적들의 소굴이 되고 호랑이와 멧돼지가 옛 마을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변방의 방비가 없게 되자 왜적이 더욱 깊이 들어와 원주, 춘천, 철원을 침범하였고 공주의 수령을 살해하였다."
(양촌집)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의 군대가 북쪽 국경 쪽에 몰리면서 서해안, 남해안의 방어가 약화됐다.
이때 바다 건너 왜구의 침입이 크게 늘어나 고려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외침을 막기 위해 고려 정부는 어떤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국보인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출처: 매경DB)
Q. 고려 말 고려의 군대는 어떤 상황이었나요?
A. 원나라 황제의 부마(사위)였던 고려 왕은 원나라 간섭기에 군대를 쓸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원나라(몽골) 사위 국가를 넘보는 다른 나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원나라 쇠퇴 이후 고려는 군대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외적의 침입을 맞아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번째는 홍건적의 침입이었습니다. 당시 일부 중국인들은 홍건적이라는 이름으로 원나라 세력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원의 반격으로 요동 쪽으로 도망쳐온 일부 홍건적은 고려를 침범하기도 했습니다. 1361년 10만여 명의 홍건적이 쳐들어와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란을 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공민왕은 전투 이후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고려했을 정도로 홍건적의 침입은 위협적이었습니다.
1362년 원나라는 홍건적의 침입 상황을 이용하여 눈엣가시 같던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 왕으로 책봉했습니다. 홍건적의 침입 전후 공민왕은 군대와 장군들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낸 공민왕은 대규모 공신 책봉을 진행했는데 공신 275명 중 263명이 군대의 사령관 무장이었습니다. 이는 무장들의 정치적 지위 향상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공민왕 이후에도 북쪽의 위협은 계속되었습니다. 1382년(우왕 6년) 원나라의 남은 세력 호발도(胡拔都)가 의주에 침입했고 다음해에는 동북면에서 약탈을 이어가다가 이성계에 의해 격퇴되기도 했습니다.
Q. 홍건적의 침입 이후 평화가 돌아왔나요?
A. 아닙니다. 북쪽 홍건적의 침입에 이어 남쪽에서 왜구의 침입이 계속됐습니다. 왜구의 침입은 충정왕, 공민왕 시기를 거쳐 우왕의 즉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우왕 시기 14년 동안 총 378번, 한 달에 평균 두 차례 침입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횟수뿐만 아니라 침입의 규모도 점점 커졌습니다. 처음에는 20여 척의 선단이었으나 나중에는 500여 척의 큰 규모도 등장했고 그 인원이 수천 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해적 수준을 넘어 고려의 군대와 전투를 벌일 정도였습니다.
왜구의 피해는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를 비롯해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 전국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왜구가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이 들어와 활동하기도 했고 개경과 가까운 강화도, 예성강 하구까지 나타나면서 수도 개경에 경계령이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내륙 지방인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주장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피란과 이주 등으로 해안 지역은 '쓸쓸하게 텅 비어 버렸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고, 농토가 황폐해졌습니다. 많은 지역에 행정 공백을 초래해 세금조차 잘 걷히지 않아 국가 재정에 큰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Q. 고려는 어떤 대응책을 마련했나요?
A. 계속되는 홍건적,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고려는 짧은 시간에 많은 군대를 준비합니다. 동시에 읍성을 수축 또는 중축하며 방어시설을 갖추고 군사 조직을 정비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무력적인 토벌을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성계의 황산대첩(고려사절요).
우왕 때 최영은 충남 홍산에서 왜구를 격퇴했고, 최무선은 충남 서천(진포)에서 화약을 사용해 500여 척의 왜선을 불태웠습니다. 특히 이성계는 내륙까지 침입한 왜구를 전라도 지리산 일대 황산에서 크게 격파했습니다. 당시 강물이 왜구의 피로 6~7일 동안 붉은색을 보여 사람들이 그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당시 왜구로부터 노획한 말이 1600여 필이나 됐습니다. 1388년(창왕 1년) 박위는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의 배 300여 척과 가옥을 불태우는 성과를 냈습니다.
계속되는 외적과의 전쟁 속에 고려의 군대는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자연스럽게 군대의 사령관(신흥 무인) 권력은 점점 커졌습니다. 당시 가장 강력했던 신흥 무인은 최영과 이성계였습니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이성계는 그 군사력을 토대로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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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
공민왕 때 북쪽에서 침입해 개경을 함락했던 무리
황산대첩
이성계가 전라도 지리산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한 전투
화약
최무선이 진포 전투에서 새롭게 사용한 무기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