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5년 12월 06일 토요일

고려 왕건은 왜 고구려 수도를 챙겼을까요

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입력 2025-04-07 09:10
목록

“옛 도읍인 평양이 황폐해진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여진족이 변방을 침략하기도 하니 해로움이 크다.

마땅히 백성을 옮겨 이곳을 채우고 변방을 굳게 지켜 대대손손 이롭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평양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 사촌 동생 왕식렴을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사)

 

후삼국시대와 왕건의 북진정책

후삼국시대와 왕건의 북진정책.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 정했습니다. 강한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갖고 있던 왕건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시하여 개경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서경(西京)'이라 했어요. 왕건은 왜 서경을 중시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했을까요?

 

 

 

Q.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상황은 어땠나요?

 

A. 왕건은 옛 고구려 지역이었던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이었습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후고구려의 건국(901년)을 도왔고 자신이 살던 송악(훗날의 개경)이 수도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초기와 달리 궁예는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며 점점 황해도 지역의 호족들을 견제합니다.

 

911년 궁예는 황해도 호족들의 실망을 뒤로한 채 멀리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조차 ‘태봉'이라고 바꿉니다. 청주의 호족 세력과 손잡아 많은 사람을 수도 철원으로 이주시키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합니다.

 

궁예의 부인인 강비는 원래 황해도 지역 호족 집안 출신입니다. 강비는 황해도 지역 호족들을 대변하여 궁예를 압박했다가 도리어 비참하게 죽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자식, 왕자들도 모두 죽으며 황해도 지역 호족들은 궁예 사후 왕위 계승 역시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918년 권력에서 점차 배제되던 황해도의 호족세력들은 왕건을 중심으로 궁예를 몰아내고 다시 수도를 자신들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되돌리고 국호 역시 ‘고려'로 하였습니다.

 

호족들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왕건의 왕권은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강릉의 호족 김순식은 오랫동안 복종하지 않아 왕건이 근심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입니다. 게다가 남쪽에는 강력한 후백제의 견훤이 존재했고 신라를 구하러 가다가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대패하며 죽을 뻔했을 정도였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왕건은 여러 호족의 마음을 얻고자 호족 통합 정책을 추진합니다. 후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강릉 호족의 지지를 얻어냈고, 왕 즉위 이후 각지의 강력한 호족 딸 25명과 정략결혼을 하며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Q. 왕건은 왜 북진정책을 추진했나요?

 

A. 기본적으로 왕건은 고구려 계승 의식이 강했습니다.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진정책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려 건국 이후로도 왕건의 왕권은 매우 약했습니다. 왕건이 왕권 강화를 위해 찾아낸 묘수는 ‘북진정책'이었습니다.

 

수도 개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쪽 지역은 호족이 사실상 그 지역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왕권이 약한 왕건은 죽을 때까지 그곳을 통치할 지방관 1명을 파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왕건은 북쪽에 주목합니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북진정책을 추진해 새로운 북쪽 땅을 점점 확보했습니다.

 

그 결과 태조(왕건) 말년에는 평안도 청천강에서 함경도 영흥지방에 이르는 영역까지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새로 얻은 그 땅에는 호족이 없었고, 왕의 직접적인 통치 지역으로 왕권 강화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영토는 훗날 고려의 지방행정 조직(5도 양계)에서 북쪽 국경 지역에 해당되는 ‘양계(북계+동계)'가 되었습니다.

 

호족들이 마음대로 다스리는 5도(경상도, 전라도, 양광도, 서해도, 교주도)는 지방관이 없는 속현이 많았지만, 왕이 직접 정복한 양계(지금의 평안도, 함경도)의 대부분 지역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었습니다. 양계에는 왕이 파견한 병마사가 국경의 군대를 지휘하였고, 국경에는 강력한 왕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북쪽 지역의 중심은 당연히 서경(평양)이었고, 왕건은 유언 훈요10조에도 밝혔듯 서경을 중시하라고 자주 언급했습니다.

 

태조와 고려 3대 왕인 정종은 서경으로 천도할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했던 서희가 수도를 ‘서경'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고려 초기의 왕들은 1년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4개월 정도를 서경에 머물며 정치를 했습니다. 이렇듯 왕건이 중시했던 서경 지역은 고려 초기 왕권 강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00여 년 뒤 이 서경 지역의 대표였던 묘청이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며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까지 지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

 

 

평양(서경)

왕권이 중시한 옛 고구려의 수도

 

북진정책

왕건이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추진한 정책

 

양계

남쪽 5도와 대비되는 북쪽의 국경지역

지금 꼭 알아야할 뉴스! 정기구독 바로가기 제41회 틴매경 TEST 지금 신청하기
매테나 매일경제 경제경영연구소 매경 취업스쿨 인스타그램 매일경제 경제경영연구소
틴매경
구독 신청
매경TEST
시험접수
매테나
유튜브
매경
취업스쿨
매일경제
아카데미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