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소 남해 상주중학교장
입력 2026-03-09 09:09teen.mk.co.kr
2026년 05월 11일 월요일
경쾌하고 다정다감한 봄을 위해

윤영소 남해 상주중학교장
입력 2026-03-09 09:09
김유정 '봄봄' '동백꽃'

(출처: Nano Banana 생성)
겨울이 자신의 자리를 봄에 물려주는 때, 언 땅이 풀리면 우리의 옷차림부터 먼저 달라지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겨울옷 대신 한결 가벼운 옷만으로도 외출이 가능하고, 교실 창문을 살짝만 열어도 바람이 "이제 좀 살 것 같지?" 하고 묻는 느낌이에요. 운동장 흙냄새가 올라오고, 괜히 마음이 들뜨고, "이번엔 진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데?"라는 기대가 슬쩍 끼어들어요.
그런데 봄이 늘 설렘만 가져오는 건 아니에요. 약속을 자꾸 미루는 사람도 봄을 핑계로 삼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봄 지나면…" 같은 말이요. 김유정의 단편 '봄봄'은 바로 그 '기다리게 하는 봄'에 대한 이야기예요. 봄이 한 번 오고 기대하는 바가 실현되면 좋겠는데 그게 맘대로 되지 않는 것, 이런 것이 우리의 인생이기도 해요.
줄거리는 간단해요. 주인공 '나'는 어떤 집에서 일을 정말 열심히 해요. 논밭도 일구고, 심부름도 하고, 미래의 달콤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된 일을 묵묵히 한답니다. 이유가 있거든요. 점순이랑 혼례를 약속한 '장인어른'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장인어른 후보, 그러니까 점순이 아버지의 얄궂은 농간이 그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올해만 더 일하면, 그리고 점순이 키가 조금만 더 크면 시집보내지" 하고는 시간을 계속 끌죠. '나'는 속으로는 답답한데 또 "그렇겠지…" 하며 마냥 기다려요. 그 집은 봄이 오면 "조금만 더", 여름이 오면 "조금만 더", 가을이 오면 "조금만 더" 하면서 끝없이 미뤄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동안 약속도 살랑살랑 멀어지는 셈이에요.
이 작품이 진짜 웃긴 건 주인공이 '바보'라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착하고 성실해서 웃긴 거죠.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 "내가 열심히 하면 언젠가 인정받겠지" 하는 마음이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희극이 돼요. 뭐랄까, 순수하고 순박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오는 따뜻한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거예요.
점순이도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그냥 '얌전한 처녀'가 아니라 말도 행동도 통통 튀죠. 심술도 부리고 장난도 치는데, 그게 또 이상하게 귀엽고 얄미워요. 그래서 이야기 속 감정이 단순하지 않아요. '속이는 집' 대 '속는 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사이에 알쏭달쏭한 설렘과 자존심, 오해가 섞여 더욱 인간미를 발휘하게 된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봄봄'은 문장이 맛있어요. 리듬이 경쾌하며, 말투가 살아 있고, 장면이 눈앞에 탁탁 그려지죠. 설명이 길지 않은데도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요. 그래서 독서가 '공부'처럼 느껴지기보다 드라마 한 편을 빠르게 보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대사와 상황의 타이밍이 좋아 읽다 보면 웃음 버튼이 여기저기 숨어 있어요. 물론 그 웃음이 달콤하기만 하진 않죠. "아, 저런 식으로 사람을 이용할 수도 있구나"라는 씁쓸함이 남아요. 그런데 그 씁쓸함이 바로 교양이고 상식이에요. 세상에는 '말로 약속을 미루는 사람'이 있고, '착해서 참고 넘기는 사람'이 있죠.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너는 어느 쪽이니?" 하고요.
물론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그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할 거예요. 고지식하게, 무슨 공식처럼 천편일률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또 뭔가 억울한 것 같은데도, 그 억울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있기도 해요. 왜냐하면 사람 사는 세상이다 보니 자신의 기대와 타인의 욕망이 충돌하기도 해서, 적정한 선에서 자신을 양보하고 타협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 작품은 그렇게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순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경쾌하게 펼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권하고 싶어요. '봄봄'을 읽고 웃음과 억울함이 한 번에 밀려왔다면, 김유정의 또 다른 단편 '동백꽃'을 바로 이어서 읽으면 딱 좋죠. 두 작품을 나란히 읽으면 김유정이 '촌스럽고 우스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섬세하게 마음의 결을 잡아내는지 확 느껴져요. 그리고 제목 때문에 많은 사람이 남도의 빨간 동백을 떠올리지만, 김유정 작품에서 말하는 '동백꽃'은 그 동백이 아니라 생강나무꽃을 가리킨다는 점도 살짝 기억해두면 좋아요. 그걸 알고 읽으면 장면의 색감이 달라지고, 웃음 뒤에 남는 여운도 더 선명해지거든요. 그래서 '봄봄'으로 한 번 웃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면 '동백꽃'으로 한 번 더 웃고 마음까지 따뜻하게 데워보면 좋겠어요.
전 남해상주중 교장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