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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5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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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바다서 살아남은 남극 물고기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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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남았지?

크고 강력한 남극순환류에 의해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히게 된 수많은 종의 남극 물고기는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답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죽거나 살거나. 더 정확하게는 죽었거나,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남극 물고기들의 비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남극 바다가 물의 비열 덕분에 내륙과 비교해서 덜 춥다고는 하지만, 겨울철 수온은 -1.9도에 이른다. 이 수온은 바닷물이 얼기 시작하는 매우 차가운 온도다. 경험을 얘기하자면 얼음을 만지는 것처럼 진짜로 차갑다. 남극을 다녀온 사람 가운데 한 번도 바닷물에 손을 담가보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짜릿한 염도 높은 냉수의 느낌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어렵다. 몸속의 혈액과 체액이 얼어 들어가는 느낌이라면 적절한 비유일 듯싶다.

혈액과 체액이 얼어 들어가는 느낌을 물고기는 못 느끼는 걸까? 생물 수업 시간에 인간은 항온동물이고 물고기는 변온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인간은 음식을 먹고, 움직이며, 배설하는 과정에서 열심히 에너지를 만들고 체온을 유지한다. 항온동물에게 체온 유지는 매우 중요하며, 그 자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반면 물고기는 수온에 따라 체온이 바뀐다. 굳이 체온을 유지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썩 괜찮지 않은가. 수온이 얼마나 변하는지 상관없이 얼마든지 맞출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무임승차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속에 사는 변온동물이 수용할 수 있는 온도 범위가 있다. 견딜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면역체계가 무너지고, 결국은 폐사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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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 부동액인 결빙방지 단백질
물은 0도에서 얼기 마련인데, -1.9도에서 바닷물이 얼지 않는 것은 물속에 다량의 염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극의 바닷물은 과냉각된 셈이다. 이 과냉각된 바닷물에 담수를 넣은 유리병을 담가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병 속의 물이 꽁꽁 얼어버린다. 단단한 병 속에 들어 있는 물도 얼려버리는 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남극 물고기들의 혈액과 체액은 어떻게 얼어붙지 않는 것일까?
 
5500만년 전에도 변온동물이었을 남극 물고기의 과거로 가보자. 남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남극 대륙 연안에서 살던 물고기들에게 삶의 터전인 바닷물 온도는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수온 범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점차 차가워졌을 것이다. 변화를 느끼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너무나 장대하다. 수온이 5도에 이르기까지 4500만년이 흘렀고, 그로부터 또 100만년이 더 지나서 지금의 수온에 이르렀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나긴 시간 동안 남극 물고기는 무엇을 했을까? 남극 대륙 분리 후 어떤 생명체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시나브로 차가워지는 미묘한 수온 변화에 생명은 신비롭게 반응했다. 바로 결빙방지 단백질(anti-freezing protein)의 탄생이다. 얼음이 어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 단백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는 데 도움이 된다.

냉동고에 넣어둔 컵 안에 든 물은 어는 순간에 짠 하고 얼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얼음이 얼기 위해서는 얼음의 시초가 되는 작은 조각, 즉 얼음의 핵(ice nucleus)이 필요하다. 그 핵의 표면에 또 다른 얼음 조각이 붙으며 조금씩 얼음이 커져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결빙방지 단백질이 시초가 되는 얼음핵의 주변을 빼곡히 감싸고, 다른 얼음 조각이 붙을 수 있는 공간을 용납하지 않으면 얼음은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얼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남극 물고기의 혈액이 얼지 않는 비결이다.

'왜 남극 물고기의 혈액은 얼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1950년대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의 퍼 프레드릭 숄랜더 박사였다. 10년의 세월이 더 흘러 그 존재를 증명한 사람은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인 아서 드브리였다. 그는 남극 물고기의 혈액을 뽑아 혈장과 성분들을 분리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혈장의 경우 -0.7도에서 얼었다. 남극 물고기 혈장의 어는점을 확인한 셈인 동시에 -1.9도에서도 혈액이 얼지 않는 비결이 물고기의 혈장에 들어 있는 어떤 성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이제 남은 후보는 바로 혈장과 별도로 분리해낸 침전물들이었다. 그 침전물들을 하나씩 혈장에 첨가한 후 다시 얼리기를 반복한 결과, 어떤 침전물을 넣었을 때 어는점이 거의 -1.9도 이하로 떨어졌다. 이 물질이 바로 결빙방지 단백질이었다.

겨울철 자동차를 떠올려보자. 엔진 가동 시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해 넣어주는 냉각수가 얼면 낭패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넣어주는 부동액(에틸렌글리콜·어는점 -12.9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남극 물고기의 결빙방지 단백질이며, 이는 일종의 생체 부동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