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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02일 토요일
실리콘밸리 학교 역설 … 폰 없애고 베틀짜기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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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보자." "싫어 더 볼래요."
아침부터 네 살 된 아들 녀석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법 오랜 시간 태블릿 PC로 동화책을 읽어주는 영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상을 볼 때 아들은 옆에 누가 와도 모를 정도로 몰입한다. 사실 이전에 책을 읽어 준 사람은 필자였다. 내 일을 디지털 기기가 대신해주는 것 같아 편해진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요즘에는 직접 읽어줄 때 금방 싫증을 내고 휙 가버리는 경우가 많아 서운한 감정도 든다. 현대사회에서는 아이들을 디지털 원주민이라 부른다. 태어난 직후부터 스마트 기기 등 디지털 미디어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반면 필자는 아날로그 시대를 충분히 경험한 후 디지털을 맞이한 밀레니엄 세대다. 허리가 휘도록 무거운 책가방을 가지고 다녔고, 현관문 옆 화분에 열쇠 꾸러미를 숨겼던 기억도 생생하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느린 속도와 불편한 점을 보완하면서 성장해왔다.
초등교육에 디지털 교과서가 도입되는 등 4차 산업혁명 이후 교육 현장도 변화하고 있다. 새로운 교육 방식은 시대 흐름과 맞닿아 있으며, 디지털을 접할 기회가 많은 아이에게 더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성장을 저해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필자의 경험이 전부라 말할 수는 없지만, 미술교육 현장에서 경험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조립형 미니카라는 키트가 있다. 과거 초등학교 남학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템이었다. 미니카 부품을 직접 조립하고 커스터마이징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심 있는 아이라면 대부분 설명서만 참고해 혼자 조립할 수 있었다.
요즘 아이들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거라 예상하고 재료를 잔뜩 구매한 뒤 아이들에게 조립 방법을 상세히 알려줬다. 그런데 아이들은 의욕에 비해 조립 과정을 힘겨워했고 여기저기 탄식 소리와 함께 포기하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이상했다. 너무 낯설어서였을까. 아니라면 아이들의 손이 무뎌졌을까.
10년 전의 아이들과 비교해 보면 분명 달라졌다. 요즘에는 앞치마 묶기, 신발 끈 묶기, 심지어 초등학교 입학 후에도 연필 쥐기를 어려워하는 아이가 종종 보였다. 이유는 스마트폰, 태블릿PC와 같은 전자기기 이용이 많아지면서 소근육 발달이 저해됐기 때문이다.
다른 교육기관 선생님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문제는 초등학생, 그리고 너무 나이가 어린 아이들조차 디지털 기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소아 전문가들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터치스크린 방식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이 증가하면서 연필을 쥘 때 사용하는 손가락 근육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근육은 대부분의 활동에 기본이 되기 때문에 발달이 더디다면 다른 활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으로 경험했을 때 더 많이 활성화되고 기억도 오랜 시간 저장된다고 한다. 이는 대부분 아날로그식 직접 경험에 해당한다. 디지털 원주민들은 이러한 경험을 예전만큼 접할 수 없다. 더군다나 디지털은 직접 경험에 비해 빠른 만족감과 보상이 이뤄진다. 직접적인 경험에 대한 디지털 세대의 관심이 줄어드는 이유다.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빠르고 손쉽게 업데이트할 수 있는 디지털 교과서는 매우 편리하다. 하지만 문해력, 비판적 사고,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종이 교과서의 이점을 넘어설 수 있을까. 디지털이 아날로그의 단점을 보완한다고 하지만 아날로그가 주는 직접 경험의 가치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필자가 디지털 시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대응으로 디지털 시대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는 성장 단계에서 아날로그식 직접 경험을 우선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Waldorf School' 교육에서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 경험과 인내심을 키울 수 있는 아날로그적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기술 혁신을 상징하는 실리콘밸리에서 디지털이 아닌 철저한 아날로그식 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고개 숙이고 게임에 몰입하는 아이들 손에 핸드폰 대신 톱과 나무를 쥐여 주자. 가상 공간 속 결과물이 아닌 땀 흘려가며 얻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카톡보다는 직접 펜으로 글을 써 의사를 전달해 보면 소중한 사람들과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친구들 앞에서 발표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과 다른 사람의 관점과 경험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새롭고 빠른 것에만 몰두하지 말고 느린 아날로그적 감성을 두루 경험해야 한다. 단언컨대 그 안에 교육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정도영 아트쿵 실험미술 대표]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