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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5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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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 작품처럼 … 예술로 진화한 '담벼락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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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미국 뉴욕 건물에 그려진 뱅크시의 그라피티 작품인 망치 소년(Hammer Boy). 픽사베이

 

"어머, 우리 아이가 색연필로 낙서를 하고 있네?"

아이는 성장 과정에서 손과 손가락에 점점 힘이 생긴다. 도구를 쥐고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시기부터 보이는 곳 아무 데나 끼적임을 시작한다. 좀처럼 알아보기 힘든 형태의 낙서들이 대부분이다. 때로는 허락되지 않은 곳에 휘갈겨 지우느라 진땀을 흘리곤 한다.

"이 사진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데?"

왕년에 교과서에 낙서 한 번 하지 않은 사람 있을까. 필자 역시 학창 시절 엉뚱한 끼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교과서를 펼쳤을 때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들이 꿈틀대는 것 같았다. 단순하게 연필과 사인펜으로 교과서 이름을 재미있게 바꾼다든지, '플립 북' 형식으로 애니메이션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땐 주변 친구들도 경쟁이라도 하듯 각자 "내 건 어때?"라며 쉬는시간에 서로의 솜씨를 비교하기 바빴다. 교과서로 노는 행위는 단순 재미였다.

하지만 학교 생활에서 이러한 모습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놈, 신성한 교과서에 지저분하게 낙서하는 못된 버릇 정도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공교육에서 교과서란 성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종종 꿀밤을 맞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교과서에 낙서하는 학생들의 자료가 방대하게 나온다. 교과서에 펼쳐진 사진과 여백을 이용한 방식이 대부분이지만 트렌디하고 완성도 높은 그림 또한 많이 보인다. 결국 교과서 안에서 노는 행위는 시대를 건너 아직도 진행 중인 듯하다.

2018년 얼굴 없는 낙서 화가 뱅크시의 '풍선과 소녀' 작품이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7억원이라는 높은 금액에 낙찰되었다. 현재 작품의 가치는 302억원까지 치솟았다. 그의 흔적인 담벼락 낙서는 높은 가치의 작품으로 인정받기도 했으며 세계적인 명소가 되기도 했다.

드디어 낙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온 것일까?라는 기대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조악하게 그려진 낙서는 도시의 미관을 해쳐 흉물로 받아들여진다. 담벼락, 전봇대 등 도심 곳곳에 행해지는 낙서는 모두 불법이며 재물손괴죄로 처벌을 받게 된다. 교육 과정에서 낙서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기도 하다.

우리는 전화를 받을 때, 지루한 강의를 들을 때, 회의하고 있을 때 무의식적으로 낙서를 한다. 단순히 지루함을 해소하거나 그때그때 쌓인 감정을 배출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낙서를 이용한다. 이때의 끄적임은 별 의미 없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창조적 사고는 무의식적인 상상 과정에서 발현될 가능성이 크다. 학창 시절에 즐겨 낙서했던 교과서를 다시 들여다보자. 그림 일부를 활용해 확장해 나가는 등 제법 고도의 스킬이 필요하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토런스 창의력 검사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아이들은 누군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창의적인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낙서하는 행위가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릇된 행동이며 때와 장소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광고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밥 이셔우드(bob Isherwood)는 매일 꾸준히 하는 낙서가 창의성 비결이라고 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분간 아무 종이나 펼쳐 놓고 자유로운 생각을 두서없이 표현하는 식이다. 쓸 때는 뭘 쓰는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들여다보면 '내가 어떻게 이런 멋진 생각을 해냈지'라고 놀랄 때가 있다며 "낙서는 창의성을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도 낙서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지녔으면 한다. 한 가지 대안으로 낙서용 노트 한 권을 지참하고 틈나는 대로 기록하면 어떨까?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청소년 시기 낙서를 통해 감각을 느끼고 존재를 인식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낙서는 엉뚱하고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즉 체계가 없는 기록이기에 그 가벼운 행위가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어른들이 섣불리 개입하여 평가하고자 하는 순간들이 온다. '이걸 도대체 왜 그렸니?'라며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담벼락에 허가받지 않는 그림을 그린 그라피티 라이터처럼 도망 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서 행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사고를 확장시켜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기록과 낙서 노트를 남기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