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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02일 토요일

교양·진학 인문

세계 최빈국의 늦깎이 여행가, 미래 탐험할 용기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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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배낭여행자 김찬삼
세계일주 무전여행기
지리교사 그만두고 세계일주
여행하다 숨졌던 친형 그리며
美부터 아시아까지 가로질러
국내 첫 여행기로 장안의 화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슈바이처
2차여행서 만나 함께 봉사하기도
"한우물 파라" 조언을 좌우명 삼아
그의 책 읽었던 한비야·구본창…
다양한 직종서 일가 이뤄내

사진설명

김찬삼 교수

1962년. 서른일곱 살의 늦깎이 여행가가 내놓은 한 권의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세계일주 무전여행기'라는 제목의 이 책은 세계 59개국을 발로 뛰며 누빈 기록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 대한민국 여권으로 무비자 입국할 수 있는 나라만 해도 189개국. 대한민국 여권이 세계에서 가장 '파워'가 센 여권 가운데 하나라지만,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해외에 나가려면 만 30세 이상이거나 공무·출장·유학 등 목적이 분명해야 했다. 그랬기에 식민시대와 6·25의 동란을 거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1962년의 대한민국에서 국경 너머의 세상을 구경시켜준 이 책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이 책의 저자 김찬삼(1926∼2003)은 1958년까지 인천고에서 지리를 가르치던 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세계 곳곳을 눈으로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으로 시작했지만 본 목적은 세계여행이었다. 그는 LA의 한 비행장에서 운전수로 취직하여 여행 자금을 모았다. 밥도 해 먹고 잠도 잘 수 있도록 중고차를 개조할 요량으로 자동차 정비 기술까지 배웠다. 혹시 밥을 굶게 될 수도 있으니 하루 두 끼만 먹는 연습도 하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1959년 마침내 그는 알래스카를 시작으로 미국 본토를 일주하며 본격적인 세계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지리교사답게 세계의 지형지물을 사진으로 남겨두었으며 좌충우돌 여행가의 모습을 여과 없이 기록했다. 북미에서 중미로 또 남미로 떠났다. 시카고에서는 갱에게 돈을 빼앗기고 차에서 겨우 잠이 들고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나체족과 춤을 추기도 했다.

사진설명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중동과 아시아로 이어진 세계여행을 하는 동안 그는 중학교 때 자전거 여행을 하다 세상을 떠난 친형 생각을 많이 했다. 친형이 사고 전날까지 썼던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달리지만 나의 꿈이 실현되는 10년이나 15년 후에는 남미의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또 '아프리카'를 답사하리라." 어릴 적 그는 이 일기장을 부둥켜안고 '형님은 갔으나 내가 그 뜻을 이루어주겠다'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형의 소원을 풀어주겠다고 세계지도를 벽에 붙이고 공상에 잠겨 지도에 여정을 색연필로 표시했으며 몇 번이나 여정을 고쳐보기도 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이어진 1차 세계일주 여행 동안 그는 자신의 친형이 그리워했던 곳에 다다를 때마다 형님의 소원을 내가 이루었으니 편히 안식하시라고 외쳤다.

1961년 7월 귀국한 그가 3년간의 여행을 정리해 '세계일주무전여행기'라는 책을 펴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기였다. TV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그의 책은 장안의 화제였다.

김찬삼은 동남아·서남아·아프리카로 2차 여행(1963년 1월∼1964년 8월)을 떠난다. 이 여행에서 그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난다. 중학생 때 도서관에서 슈바이처 책을 읽고 감명받은 뒤 그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꾸준히 편지를 보냈고 1963년 11월 아프리카 가봉 랑바레네 병원을 찾아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다. 김찬삼은 그곳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보름간 봉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인생의 지혜를 묻는 김찬삼에게 슈바이처 박사는 "한 우물만, 물이 나올 때까지 파게!"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곧 김찬삼의 좌우명이 된다.

동남아·남태평양으로 이어진 3차 여행(1969년 12월∼1970년 12월)을 마친 뒤 1972년에는 세 차례 여행을 3권으로 나누어 '세계일주기', '끝없는 여로', '세계의 나그네'를 발행했다. 그 뒤에도 수차례 세계여행을 하며 '김찬삼의 세계여행'이라는 총 10권짜리 시리즈물을 발행했다. 초호화 양장본에 전면 컬러로 꾸민 이 책은 대자연의 신비와 원시 부족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때마침 아파트 개발 붐과 교육 열풍이 불면서 이사 들어간 새집이나 학생들이 사는 집 서가에 이 책을 꽂아놓는 것이 유행이 됐다. 이 전집의 판매 부수는 100만권을 넘어섰고 김찬삼은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김찬삼이 여행기를 발간하던 시절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영향을 받아 세계일주를 꿈꾸고, 국경 밖의 세상을 동경한 사람들이 많았다. 제1회 김찬삼 여행상 수상자 윤명철 박사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과학자들, 역사학자들,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사업가들, 산악인들, 그리고 축구와 피겨, 골프를 잘하는 운동선수들은 김찬삼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을 겁니다. 미래를 탐험할 용기와 꿈을 준 빚 말입니다."

탐험가 박영석, 여행가 한비야뿐만 아니라 사진작가 구본창, 가수 배철수 등 다양한 직종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꿈을 설계하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김찬삼과 그의 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배낭여행자인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언제부터인가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오래된 여행기이고 그때와 정보가 많이 달라져서 이제는 의미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가 여행을 하고 여행기를 보는 까닭은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인생의 깨달음을 얻기 위함 아닌가.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 나오는 무수한 에피소드부터 유튜버 빠니보틀의 클립까지 아직 우리는 김찬삼이 파놓은 우물 물을 마시고 있다. 김찬삼의 여행 정신을 환기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와 출판들이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