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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2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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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확실한 것을 의심하고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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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의 마지막 혁명'
마틴 마르지엘라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맞서
버려진 놀이터에서 패션쇼
모델얼굴 베일로 가리는 등
패션계의 새로운 지평 열어

 

1983년 3월 벨기에 신문 지면에 실린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의 사진. 사람들이 디자이너가 아닌 옷에 집중해주길 바랐던 그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의 디자이너'였다.

 

지난달 29일 오후 8시, 서울 한강 잠수교가 패션쇼 런웨이로 탈바꿈했다. 세계적인 명품 회사 루이비통이 정규 가을·겨울(FW) 시즌에 앞서 사상 첫 프리폴(Prefall·초가을 컬렉션) 패션쇼를 기획하며 런웨이 장소로 한강 잠수교를 선택한 것이다.

행사 시작 시간이 되자 잠수교에는 푸른빛의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호남농악을 시작으로, 밴드 산울림의 노래 '아니 벌써'가 나왔다. 이어 패션쇼의 시작을 알리는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더니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출연했던 배우이자 모델 정호연이 푸른빛 재킷을 입고 잠수교 차로 위를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배경음악은 펄시스터즈가 부르는 '첫사랑'으로 바뀌었고, 외국 톱 모델 50여 명이 정호연을 뒤따라 서울 야경을 배경으로 행진했다. 런웨이 곁에는 시민들이 줄지어 서서 그 모습을 촬영하고 박수를 쳤다.

너무나 익숙한 곳에서 펼쳐진 이 생경한 드라마를 바라보다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의 이름은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루이비통과는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이 패션 디자이너 이름이 갑자기 떠오른 건 왜였을까?

타비 슈즈

마르지엘라는 패션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설립자다. 요즘 MZ세대가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 가운데 하나인데 네 귀퉁이에 들어가 있는 흰색 라벨 스티치를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르지엘라는 1988년 이 회사를 만들었고 2008년까지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패션계에서 은퇴했다.

'10꼬르소꼬모' 창립자 카를라 소차니의 말처럼 마르지엘라는 '패션계의 마지막 혁명'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한 20년 동안 수많은 새로운 시도를 해왔다.

패션쇼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얼굴을 베일로 가리기도 하고, 15세기 일본 전통 버선 '다비'에서 영감을 받아 신발 앞코가 갈라진 '타비 슈즈'를 선보여 패션계를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빈티지 옷들을 짜깁기해 전혀 다른 옷을 창조해내거나 옷핀을 연결해 액세서리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내가 루이비통 패션쇼를 보며 마르지엘라를 떠올렸던 건 그가 한 수많은 새로운 시도 가운데 하나와 관련 있다. 패션쇼라고 하면 업계 관계자들이 크고 근사한 공간에 입장해 지정된 좌석에 앉아 관람하는 것이 보통이던 시절, 마르지엘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1989년 가을 파리 외곽의 버려진 놀이터에서 그는 그간 패션계에서 본 적이 없는 방식의 쇼를 선보였다. 파리 5구역 안에서만 열리던 패션쇼를 파리 20구역에서, 그것도 버려진 놀이터에서 진행한다는 것부터가 충격적이었지만 진행 방식 또한 새로웠다.

그는 먼저 기존의 관습대로 캘리그래피를 담아 예쁘게 초대장을 인쇄해 나눠주는 걸 거부했다. 그 지역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직사각형의 판지를 잘라서 나눠줬고, 미술 수업 시간에 그의 패션쇼를 주제로 초대장을 그리게끔 했다. 행사 당일 좌석 배치는 선착순으로 이뤄졌고, 앞 줄은 동네 아이들로 가득 찼다. 런웨이의 땅이 고르지 않은 탓에 모델은 비틀거렸다. 스태프들은 헤어드라이어, 조명 등을 연결할 수 있는 전력이 충분하지 않아 동네 주민들의 집에서 케이블과 코드를 연결해 달라고 문을 두드리며 동네를 돌아다녀야 했다. 백스테이지에서는 아이들이 음식을 먹으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쇼가 시작되자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모델들은 아이들을 지나치면서 미소를 지었고, 이를 본 아이들 역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아이들은 모델 행렬에 합류해 나란히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 패션쇼는 옷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편, 패션쇼 자체를 재정의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도록 만들었다.

 

1989년 이 패션쇼가 펼쳐진 지 30여 년이 지난 2020년, 프랑스의 패션 브랜드 자크 뮈스는 파리 근교의 벡생프랑세 자연공원에 있는 황금빛 밀밭에서 2021 봄여름(SS) 시즌 패션쇼를 열었다. 이 쇼를 연출한 알렉상드르 드 베타크는 '쇼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창조한 장본인이기도 했는데 온갖 크고 화려한 쇼를 기획했던 그는 자크 뮈스의 풀밭 패션쇼를 진행한 뒤 이렇게 말했다.

"이번 쇼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카펫, 의자와 스피커가 전부였고, 조명은 태양이 대신해줬습니다." 베타크가 이끄는 프로덕션 '뷔로 베타크'는 앞으로의 패션쇼는 달라져야 한다며 자신들만의 기준인 일명 뷔로 베타크 10계명을 발표했다. 그 첫 조항은 이렇게 적혀 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요소가 패션의 모든 디자인과 프로덕션에 포함된다." 마르지엘라가 진행한 버려진 놀이터에서의 패션쇼가 없었다면 자크 뮈스의 밀밭 패션쇼나 루이비통의 잠수교 패션쇼 같은 현대의 패션쇼가 나올 수 있었을까? 패션쇼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이뤄질 수 있었을까? 물론 마르지엘라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이러한 시도를 했을 수 있고, 패션쇼는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했을지 모른다.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보다 우리가 중요하게 바라봐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당연하다고 보지 않은 마르지엘라의 시선이다.

"모든 확실한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예상하지 못한 것을 예상하며,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간다"는 그의 철학은 주어진 것을 당연한 듯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곱씹어봐야 할 삶의 자세다. 이를 갖출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새로운 예술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