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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교양·진학 인문

아이팟 디자인에 영감 불어넣은 미니멀리즘의 아버지

애플 `1세대 아이팟`
사진설명애플 `1세대 아이팟`

2001년 애플이 아이팟 1세대를 처음 출시했을 때 세계 곳곳에서는 아이팟이 1958년 판매된 브라운(Braun)의 'T3 포켓 라디오'와 너무나 닮아 있음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시 애플 최고디자인책임자였던 조너선 아이브는 이를 인정하며 브라운의 제품 디자이너 디터 람스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고, 그의 작업물이 애플 디자인에 조형적 영향을 미쳤음을 숨기지 않았다. 2011년 출간된 람스의 삶과 디자인 철학을 다룬 책 '가능한 한 적은 디자인(As little design as possible)' 서문에서 조너선 아이브는 람스가 디자인한 과즙 짜는 기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썼다.

브라운 `T3 포켓 라디오`
사진설명브라운 `T3 포켓 라디오`

"어떤 군더더기도 없고, 대담하고, 순수하고, 완벽하게 비례하고, 일관되고, 힘들이지 않았다. (중략) 어떤 부분도 숨겨지거나 부각되지 않고, 제품의 세부 사항과 특징의 계층 구조에서 완벽한 것으로 보였다. 한눈에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중략) 나는 당시 그 물체에 너무나도 깊게 빠져들어서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물체에 대한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오늘은 40년 전 별 생각 없이 착즙기를 사용하려던 아이브에게 제품에 대한 선명한 기억을 남긴 람스와 그의 디자인 철학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1932년 독일 중부 도시 비스바덴에서 교사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람스는 목수였던 할아버지의 작업장을 드나들며 건축과 디자인에 눈을 떴다. 1948년 비스바덴 예술대학에 진학해 건축과 인테리어를 공부한 그는 1953년부터 2년여간 오토 아펠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다 가전제품 회사 브라운에 입사한다. 그는 오디오, TV부터 커피머신, 다리미, 라이터, 계산기까지 가전제품 전 분야의 소비재를 만들어내며 브라운만의 스타일을 정립한다. 그가 정립한 좋은 디자인의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1.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2.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만든다.

3. 좋은 디자인은 미학적이다.

4.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5. 좋은 디자인은 과시하며 드러내지 않는다.

6.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7. 좋은 디자인은 오래간다.

8.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9. 좋은 디자인은 환경 친화적이다.

10.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던 단순하고 기능적인 브라운의 디자인은 다양한 가치를 발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 범문화적으로 일어나며 강한 비판을 받는다.

람스는 기능주의 디자인의 비인간적인 획일성을 야기한 핵심 인물로 지목되며 질타를 받는다. 여기에 1980년대 일본 가전제품 판매량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결국 브라운사의 디자인 주도권은 디자인팀이 아닌 마케팅팀이 가져가고, 이로 인해 람스가 확립한 브라운의 디자인 철학도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화려한 제품 디자인으로 이목을 끌던 뉴디자인 운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수그러들고, 다시 한번 젠 스타일과 미니멀리즘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여기다 바우하우스에 기반한 현대 디자인 선구자들을 재발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이어지면서 람스와 그의 디자인은 또다시 부상한다.

결정적으로 2000년대 아이팟과 아이폰이 전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두고 애플 디자인에 람스의 디자인 철학이 녹아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그동안 디자인계와 브라운 제품 수집가들 사이에서만 알려져 있던 람스는 20세기 산업디자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람스는 "애플 디자이너인 아이브가 당신 디자인을 베꼈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애플 디자인과 제 디자인은 분명 연결돼 있지만, 그것은 '적게 그러나 더 좋게(Less but Better)'라는 제 디자인 철학의 연장선상이며 저에 대한 찬사이기도 합니다."

소비자가 아니라 사용자 입장에서 제품 디자인을 고민하고 '최소한의 디자인'이라는 철학을 정립한 람스는 그가 만든 수많은 제품보다 더 오래도록 가치 있는 디자인 철학을 우리에게 남겨줬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