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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1월 2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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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불구덩이에서 20세기 예술을 구출하다

전설적인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사진은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의 한 장면. [사진 제공 = 콘텐숍]
사진설명전설적인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사진은 `페기 구겐하임:아트 애딕트`의 한 장면. [사진 제공 = 콘텐숍]
몇 해 전 검찰이 미납 추징금 환수를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에서 미술품을 압수했다. 김환기, 천경자, 데이미언 허스트 등 국내외 유명 작가 작품이 수두룩했다. 예술을 거래하는 일이 우아한 비즈니스만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림은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자주 구설에 오른다. 그래서 이 시장의 최정점인 미술 컬렉터를 보는 시각은 극과 극이다. 전설적인 미술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도 호평과 혹평을 고루 받았다. 뒤샹, 피카소, 달리, 칸딘스키 작품을 사들이며 현대미술 기틀을 세운 위대한 예술 중독자. 그 옆엔 천 명의 남성과 잠자리를 가진 섹스 중독자라는 평가도 놓여 있다.

◆ 구겐하임 가문의 이단아

미술 컬렉터의 중요한 자질은 재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기 구겐하임은 준비된 컬렉터였다. 페기는 미국 명문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친가 구겐하임 가문은 광산업으로, 외가 셀리그먼 가문은 군복 장사로 부를 쌓았다. 그럼에도 페기의 유년은 우울함으로 가득했다. 페기의 아버지는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곱 살 페기가 아버지를 향해 "밤마다 외출하는걸 보니 애인이 생겼나 봐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페기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홈스쿨링 받았던 페기에겐 친구가 없었다. 신경질적인 어머니는 머나먼 존재였다. 오직 아버지만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미술관과 여행을 다니며 좋은 취향을 길러주려 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황망하게 떠났다. 페기의 아버지는 타이타닉호 승선자 중 한 명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페기는 명문가 여자의 삶을 거부하고 미국을 떠나 파리로 향했다.
 

◆ 파리와 사랑에 빠지다

1921년 파리로 건너간 페기는 금세 예술의 도시에 푹 빠졌다. 페기는 로런스 베일이라는 예술가와 결혼했다. 7년간의 결혼생활은 무참했다. 로런스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울분을 품었고, 아내를 때렸다. 페기는 로런스와 이혼하고 존 홈스라는 비평가를 만난다. 존은 여자를 존중하는 남자였다. 예술 전 분야에서 뛰어난 심미안을 지닌 존 옆에서 페기는 안목을 키웠다. 5년간 이어진 연애는 예고 없이 막을 내렸다. 존은 간단한 수술 중 마취사고로 눈을 뜨지 못했다. 허무하게 아버지를 잃고, 연거푸 사랑에 실패한 페기는 영원한 관계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페기는 불쏘시개 같은 짧은 만남을 이어간다. 수많은 남성을 침대로 끌어들인 유대인 재벌 상속녀는 호사가들 먹잇감이 됐다.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 페기는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지인이 페기에게 화랑을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페기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런던에 '구겐하임 죈' 화랑을 열었다. 페기에겐 조력자가 있었다. 그는 현대미술의 신화로 추앙받는 마르셀 뒤샹이다.

◆ 나치에 목숨 잃을 수도 있었지만…

뒤샹은 전시 기획까지 도맡으며 페기를 도왔다. 뒤샹과 손잡은 페기는 미술 컬렉터로서 명성을 얻어 갔다. '구겐하임 죈' 화랑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회도 주목을 끌었다. 페기는 더 큰돈을 들여 런던에 제대로 된 갤러리를 짓기로 한다. 개관 전시회에 선보일 화가 리스트도 작성했지만, 끝내 새 화랑 문을 열진 못했다. 전운이 유럽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미술 컬렉터들은 미국으로 탈출했다. 페기는 오히려 서슬 퍼런 파리로 향했다. 유대인 페기는 나치에 붙잡히면 목숨도 잃을 수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파리에서 하루에 그림 한 점씩 사들였다. 전쟁이라는 난장판 속에서 예술품의 값어치는 터무니없이 추락했다.

나날이 나치의 위세가 커졌다. 페기도 그림과 함께 미국으로 탈출할 계획을 짠다. 미국행 선박에 미술품을 싣기로 한다. 그림을 이불보 사이에 넣어 불바다가 된 유럽에서 탈출시켰다. 페기와 함께 미국에 온 건 그림뿐만이 아니다. 그는 '쉰들러 리스트'처럼 나치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 망명 작전에 참여했다. 페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탈출한 인물 중엔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막스 에른스트 등이 있었다.

◆ 현대미술 중심, 미국으로 이동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는 '금세기 미술관'을 열고 유럽에서 가져온 그림을 선보였다. 페기 덕분에 현대미술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 페기는 신인 화가 공모전도 개최했다. 미술관에서 잡부로 일하던 한 남자가 그림을 출품했다. 페기는 이 무명화가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다. 미국 현대미술 슈퍼스타 잭슨 폴록은 그렇게 탄생했다.

페기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다시 유럽에 간다. 이번엔 베니스였다. 운하 근처 대저택을 개조해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을 열었다. 이 미술관은 오늘날 현대미술 애호가라면 꼭 들러야 할 성지다. 페기는 베니스에서 30여 년을 보냈고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화려한 삶을 산 여성은 남성들의 숙덕공론에 둘러싸이기 일쑤다. 재력은 페기에게 자유와 명성을 줬지만, 세상은 자유롭고 잘나가는 여성을 마뜩잖게 여겼다. 페기는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에서 인류의 보물을 지켜내고 대중과 공유했다. 그럼에도 기회를 틈타 값싸게 예술을 사들인 장사치로 폄하됐다. 평생 아무 일 안 해도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재벌이 목숨까지 걸며 포화 속으로 뛰어든 이유가 돈 때문일까?

잭슨 폴록 작품 수십 점을 기부한 페기는 "세상에 즐거움을 줬으면 됐지"라고 쿨하게 말했다. 페기는 영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 안에서 살다가 떠났다. 그가 유럽에서 구해내고, 미국에서 발굴한 예술은 인류의 자산으로 남았다. 우리가 피카소, 몬드리안, 폴록, 뒤샹의 이름을 잊지 않는 한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이름도 불멸로 남을 것이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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