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5년 01월 20일 월요일

교양·진학

교양·진학 인문

DDP 설계자, 그의 삶도 DDP와 닮았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매경DB]
사진설명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매경DB]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는 직선이 없다. 곡선으로만 이뤄진 DDP는 흐르는 물처럼 역동적이다. 거대한 미지의 생물 같기도 하다. DDP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태어난 곳의 풍경도 그랬다.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인 하디드는 어린 시절 아득하게 펼쳐진 사막을 보며 자랐다. 소녀는 바람이 불 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는 모래언덕에 마음을 뺏겼다. 유년에 하디드가 마주했던 변화무쌍한 자연의 얼굴은 그의 건축 모티브가 된다. 하디드가 태어난 이라크는 신비로운 자연을 품었을지언정 여성에겐 제대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가혹한 땅이었다. 하디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개방적인 하디드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 부녀는 틈날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하디드는 문화권에 따라 달라지는 건축 양식에 호기심을 느꼈다. 사막과 습지대처럼 다양한 자연 앞에서 심미안을 키웠다. 하디드는 일찍이 건축가라는 꿈을 가졌고, 1972년 영국 건축 명문 AA스쿨에 들어간다.

◆ '종이 건축가'라는 오명

AA스쿨에서 하디드는 조력자 렘 콜하스를 만났다. 서울 한남동 '리움 미술관' 설계에도 참여했던 콜하스는 세계 최고 건축사무소로 꼽히는 OMA를 세운 거장이다. 하디드는 콜하스와 교류하며 건축 사상을 키워나간다. 졸업 후에는 OMA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콜하스 밑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한다. 하디드는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고 설계도를 그렸다. 꿈에서나 볼 법한 독특한 건물들이 종이 위에서 탄생했다. 하디드는 1977년에 파트너로 승진했다. 그의 앞엔 탄탄대로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편한 길에서 과감하게 이탈한다.
 

온전히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하디드는 OMA에서 나온다. 그는 1980년 런던에 건축사무소를 연다. 홀로서기 한 하디드는 곧바로 장벽에 부딪힌다. 건축계는 유독 여성이 활동하기 힘든 세계다. 남성 위주의 건축계는 하디드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성별만 문제가 아니었다. 거장으로 칭송 받는 건축가 리스트를 보면 서유럽, 미국 출신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단게 겐조, 안도 다다오 등 몇몇 일본 남성 건축가 이름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주류 건축계는 '아랍계' '여성' 타이틀을 가진 하디드를 외계인 취급했다. 하지만 하디드는 악조건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83년 홍콩의 '피크 클럽' 설계 공모전에서 1등을 했다. 이후로도 크고 작은 설계 공모전에서 잇달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 건축계 노벨상 '프리츠커상' 수상

설계도로 명성을 얻은 하디드에게 찾아온 건 일감이 아니라 조롱이었다. 조약돌, 구름, 물결, 우주선 모양의 건물을 그린 하디드의 설계도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건축계는 하디드의 예술성은 인정했다. 다만 그의 이상이 실제 건축으로 연결 가능한가에 대해선 의문을 가졌다. 건축계는 하디드에게 '종이 건축가'라는 별명을 붙였다. 오직 설계도만 그릴 줄 아는 애송이 건축가라는 비하가 담긴 별명이었다.

하디드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설계 공모전 상금에 기대 사무소를 겨우 운영했다. 30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할 정도로 밤낮없이 일했다. 건축사무소를 연 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하디드는 수주를 따냈다. 의뢰인은 가구회사 비트라였다. 비트라는 하디드에게 제조공장에 들어설 자체 소방서 설계를 의뢰했다. 1994년 완공된 '비트라 소방서'는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방서로 꼽힌다. 이후 하디드에게 일감이 몰려들었다. 2004년엔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여성 최초로 받는다.

◆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DDP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 자체로 거대한 정원 모양이다. 하디드는 역사적으로 한국인이 정원을 각별히 여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거대한 DDP는 정원과 산책로를 품고 태어났다. 특별한 목적 없이 한가로이 걷고, 쉬기 위해 이곳을 찾는 시민도 많다. 하디드는 한옥 매력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했다. DDP는 정문, 후문 개념이 없는 뚫린 공간이다. 이런 개방성은 한국 전통 가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하디드는 제 나름 한국적인 요소를 DDP에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설계 단계부터 맹공격을 받았다. 'DDP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를 무시한 괴물'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이런 원성은 해외 건축가를 향한 텃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디드는 늘 다르게 생각하고 독특하게 해석했기 때문에 거장이 된 건축가다. 하디드가 한국이라는 지역성을 해석해 내놓은 결과물은 우리에게 생경했다.

1889년에 세워진 에펠탑도 시작은 DDP와 비슷했다. 19세기 말 파리 지식인 사이에선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 "나는 매일 에펠탑 안에 있는 카페에 간다. 파리에서 에펠탑이라는 흉물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여기뿐이니까." 에펠탑은 DDP 이상으로 미움 받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젠 파리를 생각하면 누구나 에펠탑을 떠올린다. DDP는 에펠탑보다 빠르게 오해를 풀었다. DDP는 올해로 개관 5주년을 맞았다. DDP는 순식간에 연간 1000만명 이상이 찾는 명소가 됐다. 지금은 괴물이란 오명을 벗고 오아시스처럼 이 도시에 활력을 공급 중이다. 하디드가 공모전 단계에서 DDP에 붙인 이름은 '환유의 풍경'이다. 산, 물결, 바람, 미래, 우주, 도시. DDP가 환유하는 대상은 많다. 정답이 없기에 모두가 정답이다. 하디드는 "건축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이 생각하지 못했던 풍경을 선사하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조성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틴매경
구독 신청
매경TEST
시험접수
매테나
매경
취업스쿨
매일경제
경제경영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