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집은 신분증이다. 어떤 지역, 어느 브랜드 아파트에 사느냐가 한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됐다. 같은 아파트에서도 자가, 전세, 월세에 따라 신분은 다시 나뉜다. 아파트에 사활을 건 이 나라가 뭔가 이상하다는 건 모두가 직감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아파트는 모두의 꿈이다. 아파트는 재테크, 노후준비, 사다리, 희망이다.
아파트 공화국 포문은 1963년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 단지형 아파트 '마포아파트'가 등장한 해다. 이 아파트는 프랑스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본떴다.
◆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
1952년 프랑스 마르세유에 세워진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아파트의 시조다. 설계자는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도시재건 프로젝트를 맡았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라고 선언하고 인간 편의에 초점을 맞춘 주거를 고안했다. 그 결과가 337가구가 들어간 12층짜리 단일 건물 '유니테 다비타시옹'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아파트 청사진은 끝내 유럽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공동주택을 천박하다고 여겼다.
르 코르뷔지에의 이상을 수혈한 건 한국이었다. '마포아파트'는 새로운 주거형태 탄생 그 이상이었다. 준공식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 등 주요 인사가 대거 참여했다. 아파트는 단번에 근대화 상징으로 치솟았다.
'마포아파트' 건립을 두고 "혁신 주택"이라며 새 시대를 환영한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김수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 현대건축 거장 김중업이다. 아파트를 찬양하던 그는 예상 못 했을 것이다. 10년 후 아파트 때문에 고국에서 추방당하게 될 자신의 미래를.
◆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 김중업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귀국해 서울대 조교수가 됐을 때 김중업 나이는 겨우 이십대 중반이었다. 야심 가득한 엘리트 청년은 1952년 베네치아에 간다. 르 코르뷔지에 때문이었다. 베네치아 국제예술가대회에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 김중업은 다짜고짜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언제 한번 파리에 있는 작업실로 찾아오라고 했다. 사실상 인사치레로 포장한 거절이었다.
누군가는 허공에서도 기어코 기회를 잡는다. 김중업이 그랬다. 르 코르뷔지에가 건넨 말 한마디를 아로새긴 그는 정말로 파리에 갔다.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을 찾아온 김중업을 결국 받아들였다.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 밑에서 3년 넘게 일하며 최전선에서 현대 건축을 온몸으로 배운다. 1956년 귀국해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 한국의 정서를 담은 건축
1959년 김중업은 프랑스 대사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주한 대사관 설계 공모전에 참여해달라는 전화였다. 김중업은 프랑스 건축가들을 제치고 공모전에 당선된다. 공사가 시작되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4·19혁명으로 나라는 어수선했고, 프랑스 정부와 공사비 차질도 빚어졌다. 김중업은 자비로 자재비를 댔다. 그는 이 작업에 모든 걸 걸었고, 1962년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완성했다.
백미는 지붕이었다. 노출 콘크리트로 만든 지붕의 끝은 우아하게 말아 올려졌다. 지붕이 하늘을 떠받치는 모양새다. 한국의 처마선이 콘크리트로 구현된 순간이었다. 한국과 프랑스 정서가 어우러진 프랑스 대사관은 김중업 건축의 이정표가 됐다. 고국에 모더니즘 건축을 이식하는 데 열중했던 김중업은 프랑스 대사관 이후 한국이라는 지역성을 반영한 작품을 만든다.
◆ 쫓겨난 건축가
현재 종로 청계천 인근에 우뚝 솟아 있는 삼일빌딩은 63빌딩 이전까지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이었다. 김중업이 설계하고 1970년에 준공한 이 건물엔 마천루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삼일빌딩은 대한민국 초고속 경제성장 아이콘 역할을 맡았다.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였다. 김중업의 위상도 삼일빌딩과 함께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곧 추락했다.
삼일빌딩이 완공된 해, 마포 와우아파트가 붕괴했다.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실 공사가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거기엔 전시행정, 뇌물, 불도저식 개발 등 온갖 화이트칼라 범죄가 뒤섞여 있었다. 김중업은 건축가인 동시에 지식인이었다. 그는 와우아파트 붕괴를 비롯해 정부 도시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명예의 길을 택한 대가는 컸다. 정부 눈 밖에 난 김중업은 반체제 인사로 몰려 1971년 추방당했다. 15년간 쌓아온 경력이 무너졌다. 김중업은 해외 여러 곳을 전전했다. 방랑은 유신정권 말기까지 이어졌다. 1979년 귀국한 김중업은 육군박물관 등을 만들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유작은 올림픽공원에 세워진 '평화의 문'이다.
◆ 인간을 위한 아파트, 아파트를 위한 인간
김중업이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하며 배운 건 현대 건축 기술뿐만이 아니다. 그는 스승의 건축 비전, 가치관, 철학까지 받아들였다. 김중업이 '마포아파트'를 반긴 이유는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라는 르 코르뷔지에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세워진 아파트가 인간 욕망에 짓눌려 무너졌을 때, 김중업의 마음도 무너졌다. 김중업은 할 말을 했고, 쫓겨났다. 9년간 방랑을 끝내고 김중업이 귀국했을 때 서울은 이미 아파트 투기 광풍으로 가득했다. 김중업의 비판의식은 그대로였다. "강남뿐만 아니라 모든 시골, 도시들도 획일화되었다"고 한탄했다.
김중업은 "건축은 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또 하나의 자연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키워드는 인간과 삶이다. 건축이란 결국 인간이 인간의 삶을 위해 구축한 자연 혹은 기계라는 것이 김중업의 믿음이었다. '인간을 위한 아파트'보다 '아파트를 위한 인간'이 더 자연스러워진 지금 이곳에서 기계는 집일까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