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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03일 목요일

교양·진학 인문

경복궁 중건때 '당백전' 쏟아내자 엽전 가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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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매경DB

경복궁 근정전. 매경DB

……변씨가 말하기를, "좋소이다."라고 대답한 후 선뜻 만 냥을 빌려주었다. 그런데 만 냥이나 빌려달라던 허생은 고맙다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 버렸다.…… 과일을 판 돈으로 칼·호미·무명·명주·솜 등을 사가지고 제주도로 건너갔다.…… 그러고도 은이 십만 냥이나 남았다. "이 정도면 변씨의 빚을 갚기 충분하겠지." 하고 변씨를 찾아갔다.…… -허생전(박지원)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몰락한 양반 허생은 역관 변승업에게 1만냥을 빌려 많은 과일과 망건의 재료 말총을 독점하여 불과 5년 만에 그 수익을 수백만 냥으로 불렸다. 허생전에서 상품의 유통과 화폐의 사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옛날에는 어떤 화폐를 사용했나요?

선사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물건과 물건을 맞바꾸는 물물교환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개껍데기가 화폐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곡식이나 옷감 등을 바꾸는 물물교환이 가장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폐 사용에 대한 기록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나옵니다. 고조선 때 '자모전'이라는 돈을 사용했다는 기록(동국사략)과 동옥저에서 '금은무문전'을 사용했다는 기록(해동역사)도 있지만 아직 유물이 발견된 것은 아닙니다. 실제 발견된 유물로는 삼한 시대 화폐로 사용되었던 '덩이쇠'가 있고, 중국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화폐 '명도전'이 있습니다. 한반도 남부 곳곳에서 발견된 '덩이쇠(쇳덩어리)'는 실제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될 정도로 화폐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국 화폐 '명도전' 역시 한반도에서 발견되면서 중국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최초의 금속화폐인 '건원중보'가 발행되었고,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떠 만든 은덩어리 고액 화폐 '은병(활구)'이 상류층 중심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화폐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쌀과 옷감을 화폐처럼 사용했습니다.

조선의 세종은 중국의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새로운 화폐제도를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화폐 사용을 주저하였습니다. 쌀로 물물교환하던 사람이 적발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자결하거나, 벌금이 과중하여 고리대를 쓰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세종 역시 더 이상의 화폐개혁을 포기하게 됩니다.

 

사진설명

언제부터 동전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나요?

임진왜란 전후 조선은 점점 상품 유통이 활발해졌습니다. 농민들은 본격적으로 자기의 곡식을 팔기 시작했고,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시장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거래되었습니다. 16세기부터 등장한 '장시(지방의 시장)'는 조선후기 전국적으로 10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장시는 5일 간격으로 정기적으로 열리는 '5일장'이었습니다. 보부상들은 장시를 돌아다니며 장사했고 여기서 화폐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주막에서 묵을 때도 밥을 사먹을 때도 물건을 살 때도 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조선후기의 화폐가 바로 '상평통보'입니다. '항상 같은 가치를 갖는 돈'이라는 뜻을 가진 상평통보는 '엽전'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나뭇가지에 잎사귀가 매달린 것과 같은 모양의 형태에 주물을 부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생산력 발달과 상품 경제의 발전으로 더 많이 사용되던 상평통보는 대동법의 시행으로 전국적인 화폐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숙종 때 영의정 허적이 왕에게 '지금 화폐가 부족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동전을 원합니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의 화폐는 이후 어떻게 되나요?

금속화폐를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생각해 일부 지주와 대상인들이 돈을 쌓아놓기만 하면서 시중에 돈이 부족해지는 '전황(돈의 가뭄)'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일부 상류층은 화폐를 통한 고리대로 큰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화폐 가치가 올라 가난한 백성들은 자신이 가진 물건(상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일부 유학자는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화폐의 유통을 금지시키자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상평통보, 즉 엽전의 가치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는 사건이 훗날 일어났습니다.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려던 흥선대원군이 상평통보보다 100배 비싼 '당백전'을 대량으로 만들면서 화폐 가치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새로 발행한 신식화폐 '백동화' 역시 일본의 '화폐 정리 사업'으로 폐기되고 일본의 제일은행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일본의 화폐로 조선의 돈을 바꿔 버린 화폐 정리 사업 몇 달 뒤, 조선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5년 뒤 대한제국은 멸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