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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03일 목요일
1944년, 일본은 왜 갑자기 조선인을 징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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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패망으로 치닫던 시기 일본인 감시원의 통제를 받으며 전쟁물자 생산을 위해 강제 동원되고 있는 조선인 부녀자들. 정성길 유엔평화공원박물관장
…반도 동포(조선인)들이 동아시아 맹주인 일본 국민으로서 영광된 책무를 짊어질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 정부가 반도 동포(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시행 방침을 결정한 이유도 역시 … 반도 동포(조선인)가 이제 숭고한 병역에 복역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는 것을 확인시킨 것이다. …
'1942년 5월 8일 일본 내각의 발표'
1941년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강대국 미국을 상대하는 상황에 놓였다. 군사력 보강을 위해 일본은 이듬해 조선인을 1944년부터 징병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수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군으로 전쟁터에 투입됐다.
일본은 왜 징병제를 실시했을까?
일본은 처음부터 조선인의 징병을 빠르게 추진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1938년 지원병제도를 실시하지만 일본은 그 당시 실제 전쟁 동원보다는 조선인에게 황국신민화 교육을 시키는 방법으로 지원병제도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의 징병을 50년 뒤, 적어도 20~30년 후의 일으로 상정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은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큰 차질이 생깁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은 200만명 이상의 군대가 필요했지만 실제 일본인만으로 병력을 충당할 경우 120만명에 불과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조선인들을 전쟁에 몰아넣는 징병제에 대한 선전 활동을 강화했으며, 그 주된 논리가 바로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하나)'였습니다. 조선인들이 병역 의무를 담당할 만큼 황국신민화되었고, 징병제 실시로 내선일체가 구현됐다는 일제의 논리는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한 대외용 명분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다나카 다케오는 '대동아전쟁의 승리가 조선 발전의 기회라는 말은 정치적 표현이었고, 사실은 전쟁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라고 실토했습니다.
일본은 민족 말살을 위해 어떤 방법을 썼나요?
1910년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을 때,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인'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조선인'으로 '일본 국민'이 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의 정책은 1930년대 이후 전쟁이 확대되면서 변화를 맞게 됩니다. '식민지를 본국의 연장이라고 생각해 식민지 및 그 주민을 본국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정책'이 실시된 것입니다. 일본은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요구합니다.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등 전쟁이 계속 확대되면서 전쟁터와 후방 병참기지에서 조선인의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전쟁 시기 조선인의 정신을 개조해 전쟁에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황국신민화 정책은 한국인의 일본인화이며 민족 말살 정책이었습니다. 1937년 조선총독부는 일왕과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황국신민서사'를 만들어 학교, 직장에서 암송하도록 강요했습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으로 모든 학교 수업에서는 일본어만 사용됐습니다. 또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했습니다. 1940년 부산지방법원장이 관내 공무원과 읍면장에게 보낸 문서(1940년 6월 12일)가 발견되면서 일본의 강요가 구체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일선동조론)'는 주장을 통해 조선인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민족문화를 지키려 노력했나요?
1920년대 유럽 유학을 다녀온 한글학자 이극로는 영국의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어가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극로는 조선어학회(당시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고 표준어 제정,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널리 홍보하고 기관지 '한글'을 지속적으로 발간했습니다.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조하며 1940년대 조선어를 금지한 일본에 조선어학회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은 조선어학회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몰아 탄압했습니다(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수십 명의 회원이 구속되고 이윤재와 한징은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출신이었던 작가 이육사는 '청포도' '광야' 등을 발표하고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43년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별 헤는 밤' '서시' 등으로 유명한 윤동주 역시 일본의 감시를 받다가 1945년 광복을 몇 달 앞두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