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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4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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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예송 논쟁, 의미없는 권력투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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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무덤인 영릉 주위에 배치된 수호신 격인 석인과 석마. 문화재청

 

"……성인이 되어 죽으면 적통이 그(소현세자, 죽은 효종의 형)에게 있어 차장자(효종)가 왕위에 올라 종묘를 계승했더라도 적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니, 어찌 도리나 이치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

 

- 현종실록

 

서인 세력의 중심 인물 송시열은 효종이 죽은 뒤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며 자의대비의 3년 상복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남인 출신의 윤휴는 국왕의 장례에는 모든 왕족이 3년 상복을 입는다는 고대 유교 경전을 근거로 3년 상복을 주장하였다.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이의 제기로 비칠 수 있었던 이 문제는 결국 예송 논쟁으로 전개됐다.

 

예송논쟁은 무엇인가요?

 

예송(禮訟)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예의에 대한 소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임금이 되었던 효종이 1659년 죽었을 때, 효종의 새어머니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해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사건입니다. 주자가례에 의하면 부모는 첫째 아들이 죽으면 3년 상복을 입고, 둘째 아들이 죽으면 1년 상복을 입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남인 세력은 효종이 비록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왕위를 계승하면서 장자의 권한을 가지고 임금이 되었으니 그를 마땅히 첫째 아들로 생각해 3년 상복을 주장했습니다. 그에 반해 서인은 효종이 비록 왕위에 올랐으나 하늘이 둘째 아들로 태어나게 한 것을 변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 1년 상복을 주장했습니다.

 

누구는 예송 논쟁을 부끄러운 역사로 보던데요?

 

일부 사람들은 예송 논쟁을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 후기 붕당정치를 조선의 멸망 원인으로 설명하며 식민사관을 펼쳤습니다. 기자 출신이었던 호소이 하지메는 '조선인에게 특이한 더러운 피가 흐른다'고 표현했습니다. 조선의 붕당정치 원리는 세력 균형을 바탕으로 상호 견제와 비판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책의 실패가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현대 정당정치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현상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자신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붕당정치, 성리학, 예송 논쟁'을 악의적으로 왜곡했던 것입니다.

 

예송 논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예송은 단순히 복식을 둘러싼 의미 없는 권력 투쟁이 아니라 시대적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송은 쉽게 말해 '왕의 어머니는 죽은 왕을 임금으로 모셔야 하는가? 아들로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왕권 강화를 강조하였던 남인 세력은 비록 왕의 어머니라도 신하의 입장으로 생각하여 3년 상복, 부모 자식의 천륜이 군신 관계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한 서인 세력은 둘째 아들로 인식해 1년 상복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예송 논쟁은 조선 후기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논의였습니다. 왜란 이후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일부 부유한 농민이 양반의 신분을 얻기도 했습니다. 태어날 때 하늘이 부여한 신분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하늘이 둘째 아들로 태어나게 했으나 첫째 아들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예송 논쟁은 당시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화를 반영한 고민이었던 것입니다.

 

예송은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어떤 의미일까요?

 

북벌론을 주장했던 효종이 죽고 그의 아들 현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은 예송을 통해 새로운 고민과 선택을 하게 됩니다. 현종이 즉위할 무렵 조선이 오래 섬겨왔던 명나라는 완전히 망하고, 오랑캐라 멸시했던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완벽하게 차지하는 동아시아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제 조선의 임금과 사대부들은 명나라로부터 이어진 중화(中華)를 지키며 청나라와 대립할지, 오랫동안 신하로서 섬겼던 중국 대륙의 황제를 현실적으로 섬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외교적 고민이 예송으로 나타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