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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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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앞에서 방귀 뀐 신하 … 실록에 박제됐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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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문화재청



세종 13년, 임금께서 "태종실록이 거의 완성되어 가니 내가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셨다. 우의정 맹사성이 아뢰기를, "실록에 기록한 것은 모두 당시 일을 후세에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보시더라도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번 보시게 되면 후세의 임금들도 이를 따라할 것이니 사관(史官)들이 두려워하여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그 말을 따랐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왕의 기록을 날짜 순으로 기록한 역사서다. 중국의 실록은 후대 황제나 대신이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눈치로 솔직하게 기록할 수 없었고, 사관의 논평조차 실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 조선의 왕들은 실록과 사초(사관이 기록한 초기 기록)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사관들의 직설적인 표현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실록은 위 자료처럼 역사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권력 앞에서도 양보하지 않은 사관들의 노력과 이에 호응한 임금의 배려 덕분에 그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왜 중요한가요.

조선은 '기록의 나라'로 불립니다.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승정원일기(승정원에서 매일 기록한 국정 기록), 일성록(조선후기 왕의 일기 형식의 기록) 등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많습니다. 주변에서 보는 눈이 많고 많은 기록이 남으면 권력자는 두려워하게 됩니다. 조선 왕조는 역사의 과오가 반복되지 않게 기록을 통해 공정성을 유지하고 권력 부정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사관은 어디까지 기록할까요.

사관은 항상 왕 옆에서 모든 것을 기록하고 남겼습니다. 심지어 말을 타다가 떨어진 태종이 부끄러워 적지 말라고 말하니, 사관이 '왕께서 기록에 남기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태종 때 민인생이라는 사관은 편전에서 업무를 보는 태종을 엿보다가 걸리기도 하였고, 밤늦게 왕이 편히 쉬는 곳까지 따라와서 왕과 부딪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영조 때 회의 중 방귀를 뀐 유근의 기록까지 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사관은 왕 옆에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자신의 의견까지 적었습니다. 조선후기 현종 때 극심한 흉년으로 세금을 줄여달라는 요구에 좌의정 원두표가 반대하자, 이를 적었던 사관은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원두표는 정승 신분으로 주상의 뜻에 영합하여 총애를 유지하려고만 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정책이 시행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너무도 애석한 일이다."


다른 나라에도 실록이 있나요.


세계적으로도 500여 년간의 왕조 기록이 하나의 체계 아래 기록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중국 왕조 실록에 비해 실제 지면(기록)이 훨씬 많아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다고 보면 됩니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유교 문화권에서 많은 실록이 편찬되었으나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입니다.

동아시아 대부분의 다른 나라 실록은 필사본이지만, 조선왕조실록만 거의 대부분이 활자로 인쇄되었습니다. 한두 개만 만들었던 다른 나라 실록은 필사로 충분했지만, 처음부터 후세에 영구히 전할 목적이었던 조선왕조실록은 여러 곳에 분산 배치할 목적으로 활자 인쇄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재입니다.


1명의 왕에 실록이 2개인 경우가 있나요.

정권이 바뀌면서 실록이 다시 편찬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광해군 때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을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수정하여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었습니다. 붕당 대립이 극심했던 조선후기에 현종실록, 숙종실록, 경종실록은 다시 편찬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록을 개정했다고 해서 앞의 실록을 없애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의견과 달라도 앞의 기록은 두고 자신을 변호하는 새로운 실록을 만든 것입니다.

 

실록은 어떻게 보관하였나요.

실록은 사고(史庫)에 보관하였습니다. 사고는 실록이나 왕실의 기록 등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창고로 수도인 한양 춘추관(역사를 기록하는 관청)에 하나를 두고 지방에 3곳의 사고(충북 충주·경북 성주·전북 전주)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전국 사고의 실록은 모두 없어질 위기에 처했고 실제 한 곳을 제외한 다른 곳의 실록은 소실되었습니다. 다행히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안의와 손홍록은 전주 사고의 실록과 태조의 어진 등을 소와 말 30여 마리에 싣고 내장산 동굴로 가져가 숨겼습니다. 당시 64세의 안의, 56세의 손홍록은 그곳에서 1년 동안 실록을 지켜냈습니다. 그들이 전주 사고에서 실록을 옮긴 1592년 6월 22일은 2018년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 지킴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세종대왕의 기록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란 이후 실록 보관의 중요성을 느낀 조선 정부는 안전을 위해 한양 외에도 지방 산간의 4곳에 사고(봉화 태백산·무주 적상산·강화 마니산·평창 오대산)를 설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