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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4일 화요일

교양·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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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학자들, 민생 등진 '유교꼰대'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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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신분제 흔들리자
지배계급, 예법만 더 강조나서
농업기술 발달해 생산량 늘어도
탐관오리 수탈에 서민삶 피폐
정약용, 자영농 육성책 내놓고
박지원, 상공업 부국강병 강조
사진설명
다산 정약용

"…왜란 이후 법도가 무너져 버렸고 모든 것이 어지러워졌다. 군영을 늘리면서 국고가 바닥을 드러냈다.…탐학의 풍조가 크게 일어나 백성들은 초췌해졌다. 일찍이 내가 생각하건대 병들지 않은 터럭이 하나도 없다.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멸망하고 말 것이다. 어찌 충신과 지사가 수수방관하겠는가?…" (정약용 '경세유표')

다산 정약용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멸망하게 될 위기 상황으로 보았다. 그는 일부 관리들이 주장했던 비용 절감이라는 처방으로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고 근본적인 개혁만이 망해가는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어떻게 조선을 구할 생각을 했을까?

Q. 왜 실학이 필요했을까요?

A.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거치며 조선은 사회·경제적으로 크게 변하게 됩니다. 양반에서 농민까지 철저한 피라미드 신분제는 왜란을 거치며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모내기법의 확산 등 농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농민 중에서도 부자 농민(부농)이 등장합니다. 전쟁을 거치며 일부 양반들은 몰락했습니다.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처럼 평범한 농민 수준으로 가난해지기도 했습니다. 상업에 종사하여 큰돈을 번 상인이나 넓은 땅을 소유한 부농이 가난한 양반을 보는 눈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지배층 관료들은 이 모습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습니다. 그 결과 신분제를 뒷받침하는 성리학을 도리어 더 강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성리학은 점점 교조화되어 거의 종교 수준이 되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면 윤휴나 박세당처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거나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주인과 노비, 양반과 상민'의 수직적 관계만을 강조하여 사회 변화의 움직임을 억압하려 한 것입니다. 17세기 조선시대의 '꼰대'는 성리학적 명분론만 강조하여 열녀비를 세우고, 효자를 발굴하고, 장자 중심의 예법을 더욱 강화하였던 것입니다.

조선 실학자들은 성리학이 더 이상 조선 후기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현실 생활과 직결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끌 개혁론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Q. 정약용의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A. 정약용은 당시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고 힘든 생활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땅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생산량이 늘어났으나 남의 땅을 소작하여 무거운 소작료를 내고 탐관오리에게 수탈당하면 남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땅을 가진 자영농을 육성하는 토지제도 개혁에 관심을 갖습니다.

지주의 땅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재분배한다는 정약용의 생각이 공산주의 토지개혁과 비슷하다고요? 결과는 같지만 그 생각의 시작은 전혀 다릅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성리학을 깊이 공부한 학자입니다. 그는 지금의 성리학이 공자, 맹자 등 성현들이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약 지금 조선의 모습을 공자께서 보셨다면 어떤 해결책을 내놓으셨을까?'를 고민합니다. 공자와 관련된 초기 유교의 학문과 역사를 집중적으로 보던 정약용은 중요한 내용을 찾습니다. 공자는 당시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를 비판하며 그 바로 직전의 '주나라' 시절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주나라는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정전제가 실시되었던 나라였습니다. 여기서 정약용은 무릎을 탁 치며 깨달았습니다. "공자께서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나라는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것이구나!"

정약용은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농사를 짓는 여전론을 제시합니다.

사진설명
연암 박지원

Q. 박지원은 왜 다른 주장을 할까요?

A. 정약용을 비롯한 일부 실학자들은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토지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을 했던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은 당시 권력에서 점차 밀려나던 남인들이었고 정약용을 제외하면 관료도 아니었기에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주장을 하는 실학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분배해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빈부의 격차가 나타날 것이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권력과 땅을 많이 가졌던 노론 쪽 사람들이 많아 토지제도 개혁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백성이 농사만으로 잘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누군가는 책상을 만들고, 누군가는 감자를 팔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상공업을 장려해야 진정한 조선의 부국강병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상공업이 발달했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북쪽의 나라(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그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 불렀습니다.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대표적인 북학파 실학자입니다.

Q. 정약용, 박지원 등이 죽은 뒤 실학자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A. 실학자들의 전성시대는 정조 임금 재위 기간이었습니다. 정조는 급진적인 사회개혁론에 가까운 실학을 채택하지 않았지만 실학자들의 비판적 의견을 크게 탄압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양한 실학자들의 의견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정조가 죽고 얼마 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세상은 크게 변했습니다. 단지 왕의 외척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갖게 된 세도 가문은 '비판'을 두려워하여 사회개혁론을 탄압합니다. 기존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노력도 거부합니다. 실학자들에게도 위기가 닥쳐옵니다. 말 한마디를 잘못하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 가문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많은 실학자들은 간접적인 비판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19세기 실학자들은 세도 가문과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탄압을 덜 받는 고증학적 방식에 의존하여 다양한 책을 저술합니다. 그 가운데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를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합니다. 한치윤의 '해동역사', 김정희의 '금석과안록',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유희의 '언문지',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대표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