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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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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백회의가 만장일치 방식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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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신라 6부족 연합체로 시작
부족회의가 화백회의로 확대
전쟁하려면 만장일치가 필수
23대 법흥왕, 강해진 왕권으로
관등제 정비하고 상대등 임명
병부 설치해 전쟁 수행도 결정
사진설명
화백회의에 대한 삼국유사 기록.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는데, 이를 '화백(和白)'이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그만두었다."(신당서) ……"제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이며 성은 김씨이다. 병신년에 왕위에 올라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음란하여 화백회의에서 그를 폐위시켰다."(삼국유사)

화백회의는 신라의 귀족회의로 국가의 중대사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진골 귀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에서 태종무열왕(김춘추)처럼 왕으로 추대되기도 하였고, 진지왕처럼 폐위가 결정되기도 하였다. 백제와의 전쟁, 중국과의 외교 정책 역시 이곳에서 논의되었다.

사진설명
이차돈 순교비(경주 국립박물관 소장).

Q. 화백회의는 왜 만장일치로 결정했나요?

A. 초기의 신라는 여섯 부족(6부)의 연합체로 시작되었습니다. '큰 알이 있어 깨뜨려 보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6부 사람들이 그를 신성시하여 임금(박혁거세)으로 삼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6부 연합체 회의에서 국왕을 추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6부 연합체 회의는 나중에 화백회의로 확대 재구성되었습니다.

6부에서 시작된 신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강력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서라벌(지금의 경주) 주변을 지배하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왕권이 미약하여 초기 건국 세력이었던 박씨(박혁거세의 후손), 석씨(석탈해의 후손), 김씨(김알지의 후손)가 돌아가면서 왕 노릇을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왕에 대한 칭호 '이사금'은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4세기 말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내물왕이 겨우 김씨의 왕위 독점을 이루고 왕의 칭호도 '우두머리'라는 뜻을 가진 '마립간'으로 바꿉니다.

국가의 힘이 약했던 신라에서 전쟁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국가의 힘도 약하고 국왕의 힘도 약했던 신라는 나라 안의 거의 모든 세력을 다 모아야 겨우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6부의 회의로 시작된 귀족회의(화백회의)에서 한 명이라도 반대를 하면 전쟁 수행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화백회의의 방식은 미약했던 신라의 상황을 반영하여 국론을 모으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Q. 화백회의에 변화는 없었나요?

A. 모두가 만장일치로 전쟁을 결정해야 진격할 수 있었던 초기와 달리 신라는 주변 지역을 점령하는 정복전쟁 과정에서 점차 왕권이 강해지고 국력 역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강력해진 왕은 점차 화백회의의 족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습니다.
신라 제23대 국왕이었던 법흥왕은 화백회의 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먼저 520년 율령을 반포하고 관등제를 정비합니다. 법(율령)을 통해 화백회의의 자의적인 결정에 어느 정도 제약을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527년 신라 최초로 불교를 공인합니다. 당시 토착신앙을 믿던 화백회의 진골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으나,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권 강화를 뒷받침하는 국가 종교로 불교를 지원하였습니다. 법흥왕은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줍니다. 529년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야 지역의 왜군을 격퇴하고 금관가야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결국 532년 금관가야는 법흥왕의 신라에 항복하며 멸망합니다). 법흥왕 때 왕권은 비약적으로 강력해져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법흥왕의 마지막 카드는 상대등 임명이었습니다. 원래 신라의 왕은 화백회의의 의장이었습니다.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에 왕이 참석한다는 것은 왕 역시 귀족의 일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법흥왕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왕은 더 이상 너희와 같은 귀족이 아니다'는 것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531년 이찬 벼슬의 철부를 귀족의 대표 '상대등'으로 임명하면서 더 이상 화백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하는 관행을 끊어냅니다. 아울러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관청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화백회의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가 아니라 국왕의 군대로 변화시킵니다.

선덕여왕 재위 말년(647년) 상대등이었던 비담과 염종의 반란, 신문왕 때 상대등이었던 김흠돌의 난으로 화백회의는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삼국통일 이후 국왕 직속의 최고 관청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화백회의는 주요 결정 과정에서 배제됩니다.


Q. 다른 나라에도 화백회의가 있었나요?

A. 부여에도 비슷한 부족장회의(귀족회의)가 있었습니다. 부여는 초기의 신라와 비슷하게 왕권이 미약하여 부족장이 자기 지역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제도(사출도)가 있었습니다. 가축의 이름을 딴 부족장들(마가, 우가, 저가, 구가)은 매우 강력하여 왕을 선출하거나 몰아내기도 하였습니다. '비와 가뭄이 고르지 못해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삼국지 위서의 기록은 부여의 왕권이 미약했음을 보여줍니다.

부여의 풍속을 계승한 고구려 역시 5부족 연맹체(계루부, 절노부, 연노부, 관노부, 순노부)로 시작한 작은 국가였습니다. 고구려의 부족장 명칭 역시 부여와 마찬가지로 '가(加)'였습니다. 하지만 일찍부터 활발한 정복전쟁에 나섰던 고구려의 왕은 왕권을 강화하며 다른 부족장을 압도하였습니다. 강력해진 고구려의 왕에게 5부족 연맹체 시절의 귀족회의 기록은 지우고 싶은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분명 당시에는 존재했던 고구려 부족장의 구체적인 명칭은 지금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부족장을 '가(加)'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고구려의 귀족회의 '제가(諸加)회의'는 말 그대로 '모든 부족장의 회의'에서 시작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기록이 많이 없으나 고구려의 관등제도에서 그 시절 부족장의 흔적을 일부 찾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관등에 나오는 '상가(上加), 고추가(古鄒加)' 명칭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구려의 부족장 세력이 고구려의 중앙권력으로 편입되면서 관료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백제의 귀족회의로는 '정사암회의'가 있습니다. '정사암'이라는 바위에 모여 중요한 논의를 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정사암회의는 백제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짓는 귀족회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