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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5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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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원래 프랑스와 손잡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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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프, 청나라 점령에 큰 충격
조선에 러시아 위협 고조되자
프랑스와 수교 협상까지 구상
러 위협 가시자 쇄국정책 돌입
청의 서양인 처형에 자극 받아
병인박해 등 대대적 종교탄압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 대원군이 러시아 사람들을 쫒아낼 수만 있다면 (천주교)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합니다. …… 그는 러시아가 조선을 위협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프랑스인 주교 베르뇌의 편지 중에서)."


서양 세력을 일체 배격하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유명한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신부에게 천주교 종교의 자유를 제안했다는 기록입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모습과 달리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인 프랑스와 협상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Q. 흥선대원군은 왜 프랑스인 신부를 만나려고 했을까요?

A. 흥선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서학)에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과 딸들이 천주교를 믿고 있었고, 어릴 때부터 고종을 키웠던 유모도 마르타(martha)라는 세례명을 가졌던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특히 고종의 어머니이자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었던 여흥 민씨는 매일 기도문을 암송하며 외국인 신부에게 왕이 된 아들을 위해 감사의 미사를 직접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흥선대원군 본인도 천주교 신자였던 관리 남종삼에게 개인적으로 '서학(천주교)은 진실된 종교'라고 뜻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급변하는 국제 정세였습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단번에 점령했습니다. 당시 중국 청나라가 가장 강력한 나라라고 믿던 조선의 지배층과 백성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베이징 점령 직후 청나라를 방문했던 조선의 사신들과 역관들은 서양의 공격으로 파괴된 베이징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훗날 젊은 개화파 관리들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박규수(사신)'와 '오경석(역관)'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베이징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얻었습니다.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 추진과 조선에 대한 통상 요구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1864년 2월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부에 통상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하고 돌아갑니다. 이어 1865년 9월과 11월에는 많은 러시아인이 우리 땅으로 들어와 외교 문서를 들고 직접 남쪽으로 내려가겠다고 위협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나중에는 러시아 군함이 영흥만에 나타나 곧 러시아 군대가 통상을 위해 육로로 국경을 넘어올 것이라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조선의 안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받던 시기였습니다.

천주교를 믿던 남종삼을 비롯한 일부 조선 관리들은 흥선대원군에게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지키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천주교 종교의 자유와 조선의 안전 모두를 보장받고 사람들로부터 조선을 지키는 애국자로 큰 명성까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흥선대원군 역시 조선의 안전을 위해 '먼 곳의 오랑캐로 가까운 곳의 오랑캐를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남종상을 시켜 조선 정부와 프랑스 정부를 연결할 베르뇌 주교와 만나려고 계획합니다.


Q. 그럼 왜 흥선대원군은 나중에 무자비한 천주교 탄압을 하죠?


흥선대원군과 프랑스인 신부의 만남이 지연되는 가운데 국내외 상황이 크게 변합니다. 바로 작년까지 몇 달 간격으로 계속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던 러시아가 자국의 상황 등으로 더 이상 통상 요구를 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으로서는 당장 전쟁이 날 것과 같았던 위기 상황이 지나간 것입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조선의 사절단이 '청나라 곳곳에서 서양인들을 사형에 처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립니다. 중국의 눈치를 보던 조정의 대신들이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들과 교섭하려던 흥선대원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당장의 위협도 사라지고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이 시작된 그때는 고종 즉위 3년째로, 흥선대원군에게 그 무엇보다 체제의 안정이 중요했습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지시합니다. 서해안의 주요 포구가 봉쇄됐고 지방관에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습니다(병인박해).

병인박해 때 조선에 머물던 프랑스인 신부 12명 중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9명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리델 신부를 비롯한 3명의 프랑스인 신부만 겨우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탈출했습니다. 프랑스인 신부의 처형에 분노한 프랑스 극동 함대 로즈제독은 강화도에 상륙하며 조선과 전쟁을 치렀습니다(병인양요).

2년 뒤 통상을 요구하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해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치는 서양 사람들은 '부모, 임금도 없는 짐승'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Q.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에 어떻게 대응하나요?

A.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은 집권 시기 내내 유지됩니다. 그렇다고 흥선대원군이 서양의 모든 것을 무조건 배척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 무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인양요를 겪으며 강력한 서양 무기의 위력을 실감했던 흥선대원군은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고 강화도에 진무영을 설치해 한강 입구를 지켰습니다. 북쪽 러시아에 대항하는 화포군도 따로 양성했습니다. 4만냥의 예산으로 화포를 비롯한 신식 무기 제작에 힘썼습니다.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약탈을 하다가 평양 군인들과 백성들에게 불탄 사건이 일어났을 때 흥선대원군은 좋은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대동강에 가라앉은 제너럴셔먼호의 엔진과 부품들을 인양해 김기두 등 기술자에게 군함을 만들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배를 끌어 한강으로 가져왔다. 목탄으로 증기를 일으켜 바퀴를 돌게 했으나 배는 무겁고 증기의 힘이 약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대원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성들이 배를 구경했다. 한참을 지나 겨우 몇 십 걸음 거리를 움직였고 사람들이 비웃었다. 그 후 배를 깨뜨려 구리와 철은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근세조선정감의 일부)

흥선대원군은 매우 카리스마가 강한 남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자신감이 강했다.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항상 존경했다'는 헐버트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평가가 비슷합니다. 카리스마 넘치던 흥선대원군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어쩌면 서양 과학기술을 내심 동경하면서 그들과 싸웠던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