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en.mk.co.kr

2024년 05월 14일 화요일

교양·진학

교양·진학 인문

˝사도세자가 역모 꾸민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133

기록으로 본 사도세자의 죽음
정신불안·발작·후궁 살인 기행
영조, 기대 못미치는 아들 불신
혜경궁 홍씨가 펴낸 '한중록'
정조 사후 가문 지키려 쓴 글
정조, 승정원일기 기록 삭제
죽음까지 몰고간 원인은 미궁

사진설명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 왼쪽 사진은 사도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한 것을 기념하여 영조가 세웠던 탕평비.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인가? 백성을 위한 것인가?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가……." - 사도세자 묘지문 일부


1762년 영조의 명으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혔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자, 사도세자 측근들은 영조를 말리다가 모두 군인들에 의해 쫓겨났다. 쫓겨난 측근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당시 11세였던 사도세자의 아들(훗날 정조)까지 데려와 영조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영조의 노여움만 더 커졌고 사도세자의 아들은 다시 처소로 보내졌다. 결국 9일 만에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죽었다. 좁은 뒤주에 갇혔던 탓에 죽은 세자의 한쪽 무릎은 끝내 펴지지 않았다.

 

Q. 사도세자는 왜 죽었나요?

A. 지금까지 역사학계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다양한 해석을 내놨습니다. 그중 한 가지 빠지지 않는 것은 사도세자 본인의 잘못된 행동입니다. 어릴 때부터 책보다 무예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는 완벽주의자 영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계속 겪습니다. 아버지 영조의 질책에 시달리며 과중한 부담감을 받던 사도세자는 10여 세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을 감싸주던 할머니 인원왕후에 이어 친어머니처럼 챙겨주시던 정성왕후(영조의 부인)마저 죽으면서 사도세자는 정신불안과 의대증(衣帶症·옷을 입으면 발작하는 증세)이 심해져 보좌하던 환관과 궁인 몇 명을 칼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여기에 왕의 허락 없이 평양까지 몰래 다녀오고, 여승을 궁궐 안으로 데려와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후궁 경빈 박씨를 죽이고 자신과 경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한 살짜리 아들(훗날 은전군)을 연못에 던지기도 했습니다(기록에 따르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아이를 구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를 옹호하던 대표적인 기록 '현고기(玄皐記)'를 쓴 소론 박종겸조차 사도세자의 정신이상과 살인 사건은 어느 정도 인정할 정도입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에는 아버지 영조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났을 때 그 누구보다도 기뻐합니다. 첫째아들 효장세자가 9세에 갑자기 죽은 뒤 영조가 40대 늦은 나이에 얻은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영조는 유일한 아들 사도세자를 엄격하게 교육했습니다. 어린 세자가 읽을 책을 영조가 밤새워 필사하며 직접 만들었고, 8세쯤 시작하는 시강원(왕세자를 공부시키는 관청) 수업도 무리하게 3세부터 앞당겨 공부시켰습니다. 영조의 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자주 혼났던 사도세자는 10대 시절부터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방황하는 사도세자를 챙겨주지 않았고 기다려주지도 못했습니다. 힘든 왕위 계승과 즉위 첫해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소론 강경파의 반란)'을 겪으며 권력의 무서움을 실감했던 영조는 자기 아들조차 정치적 상대로 생각했습니다.


비록 사도세자가 많이 부족해도, 아버지 영조의 권력 욕심이 심하더라도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마지막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훌륭한 임금이었던 성종은 훗날 폭군 중의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이 뛰어난 임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어릴 때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종 역시 연산군에게 왕위를 물려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가 급격히 안 좋아진 시기는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훗날 정조)이 태어난 뒤입니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정조가 자라면서 영조와 일부 신하들은 사도세자를 대체할 임금을 꿈꿨을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정조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믿을 만한가요?

A.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입니다. 역사학에서 기록은 쓰인 때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기록이나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들은 역사적 사료 가치가 높습니다. 그에 비해 사건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만들어진 글은 그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1762년) 직후에 쓰인 글이 아닙니다. '한중록' 1편을 제외한 대부분의 글은 자신의 아들 정조가 죽은 뒤에 집필한 것입니다. 정조가 갑자기 죽고 반대 세력의 공격에 직면했을 때 혜경궁 홍씨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남편 사도세자가 죽은 이야기를 40여 년이 지난 뒤에 글로 적었던 것입니다.

역사의 기록은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감안해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영조실록' 기록 역시 사실상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때에 편찬됐으므로 그 기록을 비판적으로 봐야 합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을 결정적으로 만든 시발점은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나경언의 고변이었습니다.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는 나경언의 글은 영조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양반도 아닌 일개 평민인 나경언은 일국의 세자를 역모로 몰았다고 결국 처형을 당합니다(그가 이런 글을 쓴 이유는 결국 묻히고 말았습니다). 정조 시기에 편찬된 '영조실록'에 '나경언은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기록만 보면 불량한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모함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던 '승정원일기'의 글을 삭제합니다. 영조가 죽기 한 달 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승정원일기가 당시 사실을 모두 다 기록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고…… 저의 애통한 마음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라는 상소를 통해 영조로부터 '승정원일기'의 그날 기록을 모두 없애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날의 자세한 기록이 정조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봤기에 없앴던 것입니다. 반대로 사도세자가 죽은 지 31년이 지난 1793년(정조 17년) 8월, 정조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 후회하였다는 '금등지사'를 공개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금등지사'의 내용으로 사도세자의 신원은 빨라지게 됩니다.

정조가 죽은 뒤에 '한중록'이 편찬되어야 했던 이유, 정조 시기에 편찬된 '영조실록'의 기록이 사도세자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이유, 정조가 '승정원일기'의 그날 기록을 삭제해달라고 했던 이유 등 모두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