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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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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더라도 이 신문을 살려 조선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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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을 사랑한 청년 베델

사진설명

올해 국가보훈처는 한국과 영국 수교 140주년과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계기로 대한제국의 항일운동을 도왔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사진)의 동상을 영국 브리스톨시에 세운다고 발표했다. 베델은 영국 국적을 활용해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종의 밀서를 보도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했던 베델은 일본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09년 37세로 순국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베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베델을 '조선의 어둠을 씻어낸 유럽의 청년'이라고 표현했고, 양기탁은 '영국 청년이 대한제국에 와서 깜깜한 밤을 밝게 비추었다'고 말했다.

Q. 베델은 어떤 사람인가요.

A. 베델은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대한제국에 왔던 젊은 영국인 기자였습니다. 그는 전쟁을 취재하면서 일본의 침략행위에 분노하여 조선인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시 상황을 핑계로 모든 신문 기사를 사전에 검열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는 형식적으로 영국 신문이었기 때문에 일본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감시와 탄압을 쉽게 받던 다른 신문과 달리, 대한매일신보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일본의 침략을 강력하게 규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조차 "나의 말 백 마디보다 대한매일신보의 기사 하나가 한국인을 더 움직이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1904년 주한 영국공사 조던은 베델의 신문이 영국과 일본 우호관계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된다는 보고서를 영국 외무성에 보낼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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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한매일신보는 어떤 보도를 했나요.

A.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뺏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했습니다. 당시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글을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일본의 탄압으로 곧장 정간된 황성신문의 글을 다시 되살린 것이 대한매일신보였습니다. 베델과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시일야방성대곡을 알리고 외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영문으로 번역해 호외판을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1907년 1월 대한매일신보는 고종황제가 외국 기자 스토리에게 건네줬던 밀서를 보도했습니다. 외국 신문 '트리뷴'에 보도됐으나 국내 조선 백성은 알지 못했던 고종의 밀서를 대한매일신보가 특종으로 보도했던 것입니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 황제가 동의하지도 않았고, 서명하지도 않았으므로 무효다'라는 고종의 밀서로 수많은 대한제국 백성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대한제국 국새가 명확히 보이는 고종의 밀서 사진은 일본조차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고종황제가 보낸 헤이그 밀사로 국제적 망신을 당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황제에서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대한매일신보가 고종의 강제 퇴위를 보도하자 수많은 대한제국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으며 항일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당시 통감부는 대놓고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을 선동하여 한국인과 일본 경찰 사이에 유혈 충돌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주장하며 영국 정부에 베델의 추방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1907년 일본 궁내부 대신 다나카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으로 가져가려다가 실패했던 '개성 경천사10층석탑'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대낮에 인부들을 동원해 거대한 경천사10층석탑을 140여 개 조각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일본 고위 장관이 대낮에 무기를 들고 조선의 문화재를 훔쳐갔다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는 당시 최고의 특종이 됐고 조선 사람들의 큰 분노를 만들어 냈습니다. 일본을 포함해 국내외 비판 여론이 날로 높아지자, 대한민국 국보 86호 경천사10층석탑은 멀고 먼 곳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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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베델과 대한매일신보는 어떻게 되었나요.

A. 베델과 양기탁은 1907년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000만 백성이 담배와 술을 끊고 조금씩 돈을 모아 일본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여러 언론기관의 지원 속에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1907년 신문지법을 만들어 대한제국의 민간신문을 통제했던 일본은 다음해 신문지법을 개정해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대한매일신보와 양기탁,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영국인 베델을 가장 먼저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영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베델을 두 번이나 재판에 세우게 합니다. 1907년 여름, 베델이 상하이에서 열리는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자, 일본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던 양기탁을 공금횡령의 누명으로 구속했습니다. 얼마 뒤 대한매일신보와 양기탁을 보호하기 위해 상하이의 감옥까지 다녀온 베델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집니다. 결국 1909년 5월 베델은 37세의 젊은 나이로 조선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 어느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베델이 죽었다는 소식에 수백 명의 조선인이 장례 행렬을 따라왔습니다. 베델의 관에는 영국 국기와 태극기가 함께 들어갔습니다.

베델은 죽기 직전 "내가 죽더라도 이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베델이 죽은 뒤 대한매일신보의 소유권은 결국 일본 통감부에 넘어가 버렸고 몇 달 뒤 대한제국은 멸망했습니다(1910년 8월). 영국인 청년 베델이 지켰던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과 그 생명을 같이했던 것입니다.

 

[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