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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4월 19일 토요일

대동법은 왜 백성들을 춤추게 했을까?

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 교사

입력 2023-09-27 10:07:00

16세기 조선 세금제도 '공납'
지방 토산물 현물납부 방식
상인·관리가 짜고 납부 막아
방납 폐단 100년 넘게 이어져
대동법은 쌀로 세금 납부
방납상인 사라져 백성 환영

 

 

"자기 마을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이 있더라도 백성이 스스로 납부하지 못하게 방납(防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권력자에게 연줄을 대고서 원래 물품 가격의 몇 배를 백성들에게 징수하고 있습니다."(조익의 '포저집' 중)

16세기 조선의 백성에게 가장 큰 부담은 '방납의 폐단'이었다. 가난한 백성은 그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속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는 도망간 백성의 세금까지 인근의 친척(족징), 또는 주변의 이웃(인징)에게 전가하여 심한 곳은 마을 전체가 텅 비는 곳까지 생겼다. 방납의 폐단에 백성은 산속으로 숨었고 당시 대표적인 산적 임꺽정은 백성의 분노를 담아 군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Q. 방납의 폐단이 무엇인가요.

A. 조선 시대에는 지방의 토산물을 현물(물건) 그대로 납부하는 '공납'이라는 세금이 있었습니다. 나라에서 사용할 물건들을 백성에게 직접 만들어오게 했던 것입니다. 마을에 할당되는 물건과 수량은 자주 변경되었고 그 지역의 특성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부과되어 백성을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산간 마을 사람들에게 고등어를, 바닷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감자를 구해 오라고 한 셈입니다.

방납은 '방해할 방(防)', '납부할 납(納)'입니다. 즉 방납은 '납부를 방해한다'는 뜻입니다. 방납 상인들은 관청의 관리와 짜고 지역 농민들이 직접 납부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백성은 방납 상인으로부터 몇 배, 몇십 배 가격으로 물건을 사서 바쳐야 했습니다.

 

방납의 폐단으로 백성은 가난해지고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몰락한 반면 방납 상인과 관리들이 큰 이익을 취하는 과정에서 국가 재정 역시 궁핍해졌습니다. 도망간 백성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세금을 걷는 것 자체가 위태로워 조선의 존립을 크게 위협했습니다.

 

대동법시행기념비(현재 경기도 평택)

 

Q. 대동법은 무엇인가요.

A. 방납의 폐단은 100년 가까이 백성을 괴롭힙니다. 중간에 이이, 유성룡 등이 현물로 받지 말고 쌀로 받아 방납의 폐단을 없애자는 '수미법'을 주장한 적이 있으나 시행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국이 황폐해지고 백성이 더 힘들어지자 결국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광해군 때 '대동법'이 시행됩니다.

대동법은 현물이 아니라 '쌀'로 받는 법입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쌀로 납부가 가능해지면서 대신 납부해주겠다는 방납 상인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또 대동법은 세금 내는 기준을 '호(戶)'에서 '토지'로 바꾸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 땅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백성에게도 가혹한 세금이었던 공납은 대동법에서 아예 내지 않는 세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대동법을 시행한 지역에서 '백성들은 춤추고 개들은 아전(지방의 하급 관리)을 향해 짖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죠. 방납의 폐단으로 새는 돈이 줄어드니 국가 수입이 증가하면서 재정도 튼튼해졌습니다. 대동법은 국가와 백성 모두를 살리는 혁신적인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대동법을 반겼던 것은 아닙니다. 대동법 시행으로 땅을 가진 사람들은 토지 1결당 12두(斗)를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토지 세금이 1결당 4두였던 것을 감안하면 땅 주인(지주) 입장에서는 기존 세금에다가 추가로 4배나 더 무거운 토지 세금이 새로 생긴 것입니다. 당시 대지주와 그들을 지지하던 대신들이 대동법을 적극 반대하였습니다. 효종 즉위 때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은 대동법에 소극적이었고 당시 주요 대신이었던 김집과 조석윤, 원두표 등은 대놓고 대동법 시행을 반대했습니다. 대동청 당상에 임명되었던 조석윤은 즉시 사직 상소를 올렸고, 호조판서 원두표는 대동법을 주장하는 김육과 크게 대립하기도 합니다. 대지주와 권력자의 반대로 그 좋은 대동법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 처음 시행되었으나 숙종 때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까지 약 10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젊은 시절 가난해서 숯 장사까지 했던 당시 우의정 김육은 대동법 확대 시행의 가장 큰 공헌자입니다. 김육은 "삼남(충청·전라·경상도)에는 부호(대지주)가 많아 대동법의 시행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가에서 법을 시행하려 할 때에는 마땅히 가난한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라며 강력하게 대동법의 확대를 추진합니다.

 

대동법 확대에 적극적이었던 김육.

 

Q. 대동법 실시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요.

A. 대동법의 시행으로 백성은 과중한 공납의 부담에서 벗어났으며 국가는 안정적인 재정수입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의 등장입니다. 공인은 나라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해서 관청에 납부하는 상인입니다.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쌀을 받았지만 원래 나라가 필요했던 것은 현물이었습니다. 바로 공인이 쌀을 나라가 필요로 하는 현물로 바꾸는 상인이었던 것입니다. 공인은 관청으로부터 미리 쌀(돈)을 지급받아 필요한 물품을 대량으로 사서 납부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인은 수많은 수공업자와 상인들에게 지속적인 대량의 주문을 하였고 그로 인해 조선 후기 상업과 수공업은 크게 발전합니다.

백성 역시 쌀로 내는 대동법 실시로 자기의 생산물을 시장에 내다팔아 쌀을 마련하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전국의 모든 백성이 시장에 물건을 내놓고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전국 곳곳에 장시가 더 크게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거래가 자주 많이 이루어지면서 손쉽게 보관할 수 있는 화폐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평통보(엽전)는 누구나 흔히 사용하는 화폐가 되었던 것입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사용도 많아지면서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 역시 발달하게 됐던 것입니다.

[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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