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입력 2026-07-06 09:08teen.mk.co.kr
2026년 07월 11일 토요일
74세 고령에도 의병장으로 나선 최익현

조인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입력 2026-07-06 09:08
최익현 초상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1906년 평생 책만 읽고 글을 쓰던 유학자 최익현은 74세의 고령으로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가 그토록 분노하며 의병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주장을 했을까?
◆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만든 최익현
1833년 경주 최씨 집안에서 태어난 최익현은 14세 때 이항로의 제자가 됐습니다. 이항로는 충청도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1866년 병인양요(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때 흥선대원군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를 정족산성에서 격퇴한 양헌수, 제천에서 을미의병을 일으킨 유인석도 모두 이항로의 제자였습니다. 최익현 역시 이항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훗날 상소를 올릴 때마다 '제 스승 이항로의 가르침'이라고 자주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1855년 23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최익현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관리로 유명했습니다. 국유지에 묘를 만든 권세가를 끝까지 처벌하기도 했고, 지방관 시절에는 사채놀이를 하던 상급자를 비판하다가 사표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최익현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868년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을 비판했던 상소 때문입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흥선대원군 앞에서 당시 아무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최익현은 '당장 경복궁의 공사를 중단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몇 년 뒤 최익현은 더 나아가 '조정에 아첨하는 무리가 많아지고 정직한 선비들이 숨어버렸다'는 상소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이때 최익현은 그 일로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 도끼 들고 상소를 올린 최익현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최익현은 도끼를 갖고 궁궐 문 앞에 엎드려 조약 체결은 절대 안된다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습니다. '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라'는 결연한 의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귀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었던 최익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를 갔습니다.
최익현은 일본을 매우 경계하였습니다. '저들이 비록 왜인의 이름을 걸었으나 사실 양적(洋賊·서양 도적)입니다'라며 왜양일체론(일본도 서양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주장했습니다. 최익현은 당시 개항 반대, 왜양일체 등을 내세운 유학자들의 '위정척사운동'(바른 성리학을 지키고 사악한 서양을 배척한다는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훗날 외세에 반대하는 위정척사운동의 흐름은 의병운동으로 계승됐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11월엔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발표됐습니다. 당시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의 양반들을 모아 집단행동을 준비했으나, 내부대신 유길준이 군대를 보내 최익현을 체포해 서울에 투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최익현이 을미의병 때 나서지 않았는지 궁금해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익현은 을미의병 시기에 침묵한 것이 아니라, 감옥 안이라 참가하지 못하고 울분을 삭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쓰시마섬에서 죽은 의병장 최익현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아 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분노한 최익현은 74세의 고령임에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익현은 나이가 많고 병이 깊으며 힘도 부족하지만 … 목숨이 아직 남아 있으니 복수할 뜻을 잊을 수가 없다'는 그의 격문은 많은 사람들을 의병으로 만들었습니다.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한 최익현의 의병 부대는 정읍, 곡성을 거쳐 순창에 집결했습니다. 최익현의 제자로 훗날 독립의군부를 결성한 임병찬도 의병장으로 합류했습니다. 최익현의 의병 부대는 곧 일본군과 조선 군대를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군대와 대치하던 최익현은 '너희들이 왜적이라면 즉각 결전하겠으나, 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다'며 전투를 중지시키고 스스로 일본군에 체포돼 쓰시마섬까지 끌려갔습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을사의병의 거센 반발을 꺾을 방안으로 일부 의병장들을 일본 쓰시마섬에 유폐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육군대신 데라우치에게 보낸 전보를 보면 '영국이 이집트를 침략할 때 이집트 민족지도자 아라비 파샤를 먼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으로 유폐했던 것'이 나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어차피 조선 정부가 최익현을 적극적으로 처벌하지 않을 테니 직접 쓰시마섬에서 관리하며 국내 항일세력과 연결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최익현은 쓰시마섬에 도착한 뒤 왜적이 주는 음식물이라며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식사를 재개했으나 고령의 최익현에게 긴 단식은 처음부터 무리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1906년 12월 30일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최익현은 일본땅 쓰시마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강남대성학원 강사·전 이화여고 역사교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위정척사운동
성리학을 지키고 사악한 서양을 배척하자는 운동입니다.
을미사변
일본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입니다.
을사늑약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를 강제로 박탈한 사건입니다.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