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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교양·진학 인문

탈진실 판치는 시대…˝진리가 다시 쓰인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설명[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가로챈 숙부에 대한 복수를 고민하면서 이렇게 독백한다. 이 말의 원어인 'to be or not to be'를 직역하면 '있음이냐, 없음이냐'라는 뜻이다. 사람에게 생명은 보통 그의 존재와 같기 때문에 이 문장이 우리가 아는 대로 번역됐겠지만 아마도 복수를 앞둔 햄릿은 단지 자신의 삶과 죽음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햄릿의 이런 고뇌는 철학자들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철학자들은 있느냐 없느냐, 아느냐 모르느냐, 좋으냐 나쁘냐 같은 근본적인 주제들을 두고 고민하는 햄릿들이다. 이번에는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큼이나 철학자들을 골치 아프게 했던 주제를 다뤄보려고 한다. 즉, '참이냐 거짓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참 또는 진리는 학자들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지향해야 할 가치로 인정되어왔다. 학자들이 누구보다도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 진리는 학문 영역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일반적인 논쟁 상황에서 우리는 권력이나 재산의 많음이 아니라 누가 '옳은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사회는 적어도 갈등의 종결자가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다.

 


사람들이 무엇이 참이냐고 물을 때 철학자들은 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참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어떤 사람들은 '좋다'를 '진리다'와 자주 맞바꿔 쓰기도 한다. 가령 '이 음식은 맛있다'를 '찐이다'와 '레알이다' 등으로 바꿔 말하는 게 이런 경우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문장이나 명제가 '참이다'라는 말에 어울리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위의 경우에 참이 될 수 있는 건 음식 자체가 아니라 '이 음식은 맛있다'라는 문장이다. 철학자들은 문장이나 명제가 참이 될 수 있다는 뜻에서 그것들을 '진리담지자(truth-bearer)'로 부른다.

무엇이 진리일 수 있느냐는 질문의 답은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전 단계다. 철학자들은 고전적으로 두 가지 견해를 주장해왔다. 첫 번째, 진리는 세계와 진리담지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포도가 세 송이 있다'는 실제로 포도가 세 송이 있기 때문에 참이다. 이런 생각을 대응론이라고 한다. 두 번째, 진리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서로를 뒷받침하는 것들이다. '세진이는 남의 빵을 먹었다'는 '세진이는 도둑이다'와 모순되지 않고, 뒤의 문장을 뒷받침한다. 이런 생각은 정합론이라고 한다.

어떤 진리 이론이 됐든 간에 그들은 한 가지 전제에 동의한다. 바로 진리들은 논리적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참인 것들은 논리 법칙을 어기지 않는다. 고전적으로 받아들여진 세 가지 논리법칙이 있다. 첫째, 동일률, 즉 A는 A다. 둘째, 무모순율, 즉 A이면서 A가 아니지는 않다. 셋째, 배중률, 즉 A이거나 A가 아니다. 대다수 철학자들은 이런 고전적인 논리를 받아들여서 세계와 진리가 모두 논리적으로 짜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관에 도전하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문장 '이 문장은 거짓이다'를 생각해보자. 편의상 이 문장을 L이라고 하자. L은 참인가? 우선 L이 참이라고 해보자. 이는 L이 거짓이라는 게 참이라는 뜻이고, 따라서 L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L이 참이면 L은 거짓이다. 둘째로, L이 거짓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는 L이 거짓이라는 게 거짓이라는 말이 되고, 따라서 L은 참이다. 그러므로 L이 거짓이면 L은 참이다. 종합하면 L은 참이면서 거짓이다. L은 앞서 살펴봤던 무모순율을 위배한다. 이는 거짓말쟁이 역설로 알려진 아주 오래된 역설이다.

이런 문제는 자신을 가리키는 문장에서만 생기는 특이한 문제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자매인 가은이와 나은이가 엄마에게 혼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가은이가 조금 더 착해서 "나은이 말이 맞아요"라고 말하는 한편 나은이는 "가은이 말은 틀려요"라고 말한다고 하자. 가은이의 말을 G, 나은이의 말을 N이라고 하자. G와 N은 서로를 가리킨다. 이런 상황에서 G가 참인지를 똑같은 절차로 판단해보라.

이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가? 이런 특이한 경우들은 무시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철학자들은 논리 법칙으로서 폭발률이 성립한다는 걸 받아들인다. 폭발률은 모순에서 모든 문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법칙이다. 예를 들어 가은이의 말이 참이면서 거짓이라면 가은이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도 따라 나온다. 일단 모순을 받아들이면 진리의 폭발이 시작된다. 아무거나 믿어도 상관없다!

역설의 역사만큼 해법의 역사도 길다. 해법들이 논리적으로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상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다음의 해법들이 제기되었다. 이 역설은 앞서 언급한 논리법칙들을 포기하면서, 역설을 일으키는 문장이 사실 온전한 문장이 아니라고 하면서, 또는 맥락에 따라 '참'의 의미가 바뀐다고 하면서 해결될 수 있다.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들 한다. 진리는 객관적이지 않고 믿기 나름이며, 공적인 의견의 기준은 진리가 아니라 감정이나 개인적 믿음이라는 것이다. 탈진실의 시대가 불러온 혼란을 목도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신뢰해 온 사회규범으로서의 진리, 그리고 논의와 합의의 규칙인 논리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깊이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진리의 댐에 난 작은 균열을 보여준다. 댐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균열을 막는 작업은 단지 현실과 괴리된 논리학자들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 <용어 설명>

▷배중률(the law of excluded middle) : 중간을 배제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