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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교양·진학 인문

달리기 선수는 거북이를 이길 수 있을까?

"세상에 운동이란 건 없다"
상식에 문제제기 `제논 역설`
근대 수학·과학 발전에 영향

일상다반사에 대한 성찰 시도
다양한 철학적 사고의 출발점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설명[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놀라움 때문에 철학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 놀라움은 숨을 쉬거나 걸어 다니는 일처럼, 우리에게 너무 상식적이어서 왜 그런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들이 낯설어질 때 생긴다. 그렇다면 철학을 시작하는 도구로 '역설'만큼 좋은 것이 없다. 역설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정들로부터 모순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역설을 접하게 될 때 우리는 당연히 여겼던 것에서 놀라움을 느끼고 그 이유를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제논(기원전 495~430년)은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우리 집 강아지가 내 앞에서 뛰어다니는 걸 내 눈으로 빤히 보고 있는데,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제논은 그게 착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계에 운동도, 변화도, 시간의 흐름도 없다고 말한다. 움직이고 변하며 지나가는 듯 보이는 건 모두 허상이다. 어떻게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가. 그는 운동을 부정하는 네 가지 논변을 제시하고, 이는 '제논의 역설'로 후대에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자.

제논은 달리기 선수인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하는 상황에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킬레스는 출발점에서, 거북이는 출발점보다 0.9m 앞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해보자. 또 그는 1㎧로 달리고, 거북이는 0.1㎧로 기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0.9m 지점에 도달할 때 거북이는 0.99m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0.99m 지점에 도달하면 그때 거북이는 0.999m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가 0.999m 지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0.9999m 지점에 있을 것이고, 계속 이렇게 이어진다. 결국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영영 따라잡을 수 없다.

 


이번에는 거북이를 집에 보내고 아킬레스가 혼자 달리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킬레스는 어떤 건물까지 달려야 한다. 그는 처음에 출발점에서 건물까지 거리의 2분의 1을 달린다. 그다음에 그는 남은 거리의 2분의 1, 즉 전체 거리의 4분의 1을 더 달린다. 그러고서 그는 남은 거리의 2분의 1, 즉 전체 거리의 8분의 1을 더 달린다. 그에게는 남은 거리를 절반으로 나누는 이 모든 단계마다 남는 거리가 있고, 이 거리는 또 그가 달리게 될 절반과 그러지 못할 절반으로 양분될 것이다. 이 단계는 계속되므로 결국 그는 건물에 도착할 수 없다. 이를 '양분 역설'이라고 한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역설, 그리고 양분 역설은 충분히 당혹스럽지만 아직 이것이 왜 운동을 불가능하게 하는지를 이해하는 단계가 남아 있다. 논점은 어떻게 무한한 일들이 유한한 시간 내에 끝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킬레스는 거북이가 있던 지점을 뒤쫓는 일을 무한히 계속하고, 그는 양분된 남은 거리의 절반을 달리는 일을 계속한다. 하지만 무한히 계속되는 일은 유한한 시간 내에 완성될 수 없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유한한 거리를 유한한 시간 안에 이동하는 모든 운동에 대해 무한한 분절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면 운동의 모든 경우에 역설이 반복되고, 따라서 운동은 불가능하다.

제논 덕분에 운동이 낯설어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역설의 문제가 무한에 대한 애매한 이해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그는 두 종류의 무한이 있다고 했다. '가무한'으로 불리는 잠재적 무한은, 아무리 많은 것이 주어져도 그 이상이 주어질 수 있다는 개념이다. 예컨대 우리는 매우 긴 선분이 있을 때 그것이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멀리 뻗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무한'을 뜻하는 현실적 무한은 무한을 이루는 모든 것이 통째로 주어져 있다는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무한은 없고 가무한만 있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제논은 거리와 운동을 무한히 분할된 점들이나 단계들이 통째로 존재하는 실무한으로 봤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고, 잠재적으로만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 따라서 무한한 분할들이 유한한 전체를 이룬다고 하는 역설의 핵심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19세기 이래 수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방식으로 역설을 해결했다. 수학의 집합론에 따르면 원소의 개수가 무한한 자연수 집합, 유리수 집합, 실수 집합이 있고, 심지어 이들 간 크기도 비교될 수 있다. 그런 집합들의 존재와 비교 가능성은 그것이 완결된 전체로 있다는 걸 뜻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반대로 실무한은 수학적으로 말이 된다. 그러면 무한한 분할들이 유한한 전체를 이룬다는 것은 생소할 수는 있지만 참이기 때문에 역설의 전제 중 하나는 틀렸다.

하지만 수학자들은 실무한이 수학적으로 말이 된다는 점을 증명했을 뿐이다. 운동은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것, 즉 공간과 시간의 관계로 표현된다. 제논의 역설을 피하는 방식으로 운동이 가능하려면 유한한 시공간 내의 무한한 분할이 가능해야, 즉 세계도 실무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여기에서 수학자는 과학자에게 배턴을 넘겨야 한다. 세계의 구조가 실무한적인지 밝히는 일은 과학 영역이기 때문이다. 제논의 역설은 운동의 불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무한에 대한 사유로 우리를 안내한다. 게다가 이 역설은 운동이 가능하기 위해 세계가 어떤 구조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관한 성찰로도 이끈다. 쉽게 일어나는 듯 보이는 일들은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 한충만 선생님은…

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

상상국어모의고사 출제위원

대원여고 인문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