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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4일 월요일

교양·진학

교양·진학 인문

즐거운 경험을 많이하면 행복한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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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힘겨운 수능시험 준비
결국 행복을 얻기위한 과정
왜 행복하려고 하냐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답 못찾아
행복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행복에 관한 모든걸 아는 것
쾌락·적은 고통 등 조건보다
그 자체로 좋은 것 가치개념
사진설명
게티이미지뱅크

2024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12년간 쌓아온 학업 성취를 증명하는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학생이 잠을 쪼개어 가며 영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며 목표한 공부 시간을 채워갔을 것이다. 아무리 쉬운 시험이라도 시험은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뭔가를 준비하게 만든다. 수많은 시험을 경험한 우리 모두가 알듯이 시험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시험을 보려고 하는가? 앞서 언급한 수능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아마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기쁨은 잠시이며 대학에서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수많은 과제와 프로젝트 그리고 어쩌면 대학 입시보다 더 어려운 취업 준비가 기다리고 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우리는 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는가? 아마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직장이라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 좋은 직장에 가려고 하는가?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많은 철학자가 그 질문을 멈추는 지점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이 모든 일을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한다. 누군가가 '왜 행복하려고 하냐'고 질문한다면 시험이나 취업의 이유를 묻는 것처럼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행복이 시험이나 취직이 가져오는 좋음과는 다른 차원의 좋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철학자들은 생각한다. 시험이나 취직 또는 돈은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위해서 좋은 것이다. 즉 그런 것은 도구적으로 좋다. 행복은 그 자체로 좋은 것,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것이다. 즉 행복은 내재적으로, 궁극적으로 좋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행복을 심리 상태로서 행복감(happiness)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행복감은 그 자체로는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뜨거움과 차가움을 느끼듯이, 행복감도 그렇게 느껴지는 일종의 정신 상태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에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 즉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려 한다. 반면 철학자들의 행복 개념은 위에서도 봤듯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가치 개념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가치적인 행복 개념을 복리(well-being)라고 따로 부른다. 우리는 이를 염두에 두고 복리로서 행복을 계속 논할 것이다.

행복의 말뜻을 알아내는 것으로 행복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행복이 내재적으로,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라면 도대체 어떤 것이 그렇게 내재적이고 궁극적인 좋음을 주는가?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즐거운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더 즐겁고 덜 괴로울수록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 같다. 우리가 맛집을 찾아다니고 춥거나 더운 곳을 피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행복에 관한 쾌락주의(hedonism)적 주장이다. 더 많은 쾌락과 더 적은 고통을 느낄수록 행복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쾌락은 내재적으로 좋은 것이고 궁극적으로 추구할 만한 것이다. 쾌락주의자가 행복해지는 전략은 되도록 많은 쾌락과 되도록 적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 해조류를 먹는 쾌락을 꾸준히 누리다가 80년을 살고 죽은 굴과 40년간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쓰고 10년 동안 명성을 누리다가 죽은 작가의 삶 중에서 우리는 어느 삶이 더 행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굴의 80년 쾌락이 사람의 10년 쾌락보다 크더라도 우리는 사람이기를 선택할 것 같다. 사람으로서 누리는 경험과 굴로서 누리는 경험은 질적인 차이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쾌락을 질적으로 동일하고 양적인 차이만 있다고 보는 관점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쾌락주의가 쾌락의 질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쾌락의 양뿐만 아니라 질도 행복을 좌우한다.

행복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과연 즐거운 경험뿐일까?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은 누군가가 쾌락주의적으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상상해봤다. 어떤 경험 기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경험 기계는 그 기계에 접속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즐거운 일만 모방해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기계에 접속한 사람은 명작을 집필하거나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명품을 사는 경험을 실제와 똑같이 느낄 수 있다. 노직은 이를 사고 실험으로만 제시했지만 가상현실(VR) 기술을 통해 절벽에 서 있는 것 같은 아찔한 경험까지 흉내 낼 수 있는 현재의 기술 수준을 미루어 봤을 때 아주 허황된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노직은 이 상황에서 당신이 기계에 접속하겠냐고 묻는다.

노직의 질문에 대다수 사람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경험 기계가 현실 세계와 동일한 쾌락, 아니 그보다 더 많고 질 높은 쾌락을 선사하는데도 접속을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은 단순히 생생하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나야 한다는 조건은 우리의 행복이 우리의 경험 바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 사고 실험은 쾌락주의적 행복론에 매우 불리해 보인다.

물론 경험 기계 접속을 거부하는 이유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경험 기계가 욕구를 현실에서 실제로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면 우리의 거부는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현실 세계에서 조작된 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움에 대한 거부일 뿐이라면 우리의 거부는 합리적이지 않다. 경험 기계를 거부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해석해보라. 그 해답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