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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6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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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들여다보니…오히려 삶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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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크고 나쁜 사건이라면
부정적인 태도 보이는게 당연
에피쿠로스 학파 새로운 해석
사건이 아닌 상태 측면서 논증
죽음은 삶에 영향 미치지 않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죽음에 대한 인류의 오랜 성찰
오히려 삶의 이유 고민하게 해
 
사진설명
게티이미지뱅크


죽음은 모두에게 슬픈 일이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나 가까운 가족의 사망 소식을 들을 때,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한 사람의 임종을 지켜보며 의사의 사망 선고를 들을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우리는 그런 죽음이 자신에게 닥칠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내가 오늘 죽는다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내가 좋아하는 집과 음식들, 내 꿈을 이룰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런 상실은 좋지 않다. 죽음은 우리에게 크고 나쁜 사건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죽음에 부정적 태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여러 종교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죽음을 대하는 방법과 삶의 의미를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 고민해온 산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죽음에 부정적 태도를 갖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우리가 합당한 이유 없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죽음이 썩 나쁜 일이 아니라면, 죽음에 큰 의미를 두고 앞으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고민하며 전전긍긍하는 것이 사실은 불필요한 일이 아닐까?

아인슈타인은 친구 베소가 죽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그는 이 특이한 세계에서 떠나는 것에서도 나를 약간 앞섰다. 이건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음이 무의미하고 더 나아가 무해하다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생각의 역사는 꽤 길다.

죽음이 우리 상식과 달리 정말 무해한 것이라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서양 고대 두 철학자의 논증을 살펴보면서 그 이유를 확인하고 이 논리가 옳은지 고민해보자.

논증을 살피기 앞서 죽음의 정의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부정적 태도를 갖는 대상인 죽음은 무엇인가? 도대체 죽음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런 부정적 태도를 가지는가? 심장과 폐의 기능이 멈추는 경우를 말하는가? 아니면 뇌 기능이 멈추는 경우를 말하는가? 의사가 사망 선고를 한 사람만 죽은 사람인가?

죽음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과 관련해 이 짧은 지면에서 간략히 다룰 수 없을 만큼 많은 논의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모호한 표현이라는 것만 염두에 두자.

첫째, '삶이 멈추는 사건(dying)'이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 '삶이 멈추는 결과(death)'로서 우리가 처한 상태라는 의미가 있다. 철학자들이 주목하는 죽음은 상태로서 죽음(death)이다. 그들은 우리가 죽음 상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선 에피쿠로스의 논증을 보자. 그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마음이 고통이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심(ataraxia)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평정심을 크게 방해하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 했다.

논증은 이렇게 진행된다. 우리는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 이전에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죽음은 삶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죽음은 우리가 죽고 난 이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죽고 난 후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에피쿠로스와 같은 학파로 활동했던 루크레티우스는 또 다른 논증을 제시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출생과 사망의 공통점을 이용한다. 출생과 사망은 '나의 부재'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나'는 출생 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사망 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출생 이전의 상태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출생과 사망이 비존재라는 점에서 똑같다면 우리는 둘 모두에 대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출생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사망에 대해서는 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는가?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 철학자의 논증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이들의 논증은 '상태로서의 죽음'에 대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때는 죽은 상태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족, 집, 음식, 희망 등을 잃는 과정, 즉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죽음이 사건이라면,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바와 달리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또 사건으로서의 죽음은 사건으로서의 출생과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비싼 스마트폰을 샀지만 곧 그것을 도둑맞았다고 가정하자. 스마트폰을 사기 전과 도둑맞은 후의 상태 모두 그것의 부재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그것의 비소유와 그것을 도둑맞음은 우리에게 다른 태도를 갖게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삶이 박탈되는 사건이고 우리가 박탈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는 건 타당해 보인다.

죽음이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무해한 것이라면 뜻밖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때에도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죽음이 나쁘지 않다면, 같은 이유로 삶도 좋지 않아 보인다. 생명을 살리는 의사들의 수고와 삶의 가치를 그런 논증 때문에 무시하는 건 찝찝한 일이다. 이 논증들이 성공하더라도 우리에게 주는 것은 죽어도 상관없는 이유뿐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따로 찾는 과제는 우리에게 여전히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