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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5일 수요일

교양·진학

교양·진학 인문

시간은 흐른다 … 그래서 무의미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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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본질은 '경과'
과거에 대한 아쉬움도
미래를 향한 기대도
시간이 흘러야 깨달아

 

얼음, 땡! 술래가 여러분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는 동안 당신을 보호해 줄 유일한 주문은 '얼음'이다. '얼음'을 외치는 사람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누군가가 "땡"으로 주문의 효력을 무마해줄 때까지 마치 동결된 것처럼 꼼짝 말고 있어야 한다. 이런 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시간이 흐르거나 멈춤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얼음땡 놀이를 전 우주적으로 확장해보자. 당신의 손목시계가 멈추고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신체 움직임과 심지어 혈액 순환도 멈춘다고 상상해보자. 더 나아가 세계는 바람도 불지 않고 구름도 지나가지 않으며 심지어 태양계와 은하계의 모든 천체가 공전이나 자전 등의 모든 움직임을 멈춘다고 상상해보라. 그야말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우주에서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을까?

이런 우주적 얼음땡 놀이는 우리가 시간에서 섞인 채로 발견하는 특징들을 분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 지나간다, 또는 경과한다"는 말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알게 되는 방식은 우리 주변에 구체적인 사물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뭇잎은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면서 떨어지고 도로의 차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위치를 바꾼다. 이처럼 변화는 사물이 다른 시간에 다른 성질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경과에 관한 질문이 흥미로운 이유는 사람들이 보통 그것을 시간의 본질로 여기기 때문이다. 시간이 공간과 구별돼야 한다면 그건 "시간은 경과하지만 공간은 경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별될 것이다. 공간이 여기에서 저기로 흐른다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어제에서 오늘로, 내일로 흐른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된다. 또 변화가 일어나려면 시간이 경과해야 한다. 우리는 화장실 바닥의 이쪽은 검은색이고 저쪽은 흰색이라고 해서 그 바닥이 '변했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다른 위치에서 다른 색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그 바닥이 어제 검은색이었다가 오늘 흰색이 되면 우리는 그 바닥이 '변했다'고 한다. 우리가 공간적인 차이가 아니라 시간적인 차이를 변화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시간만이 가지는 특이한 점, 즉 그것이 경과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과의 본성과 실재에 관한 질문의 답은 우리에게 시간에 관한 결정적인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시간의 경과를 논할 때 그들은 우선 '경과'의 말뜻을 정의한다. 그들이 보기에, 시간이 경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 절대적인 현재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시제의 흐름, 즉 미래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과거가 되는 흐름 속에서 파악한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의 시간 파악의 기준이 되는 시점인데,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는 단일한 시점이어야 한다. 모든 때가 동시에 현재일 수는 없고 현재는 여러 시점 중에서 한 시점만 누리는 특권이다. 즉 현재인 때는 단 한때뿐이다.

둘째, 어느 때가 절대적인 현재인지는 부단히 바뀐다. 한때는 영원히 현재의 특권을 누릴 수 없고 다음 때에 현재성을 물려줘야 한다. 즉 시간이 경과하려면 1)절대적인 현재가 있으며 2)어느 때가 현재인지가 부단히 변해야 한다. 문제는 세계에 정말로 이러한 경과가 있는지다.

'세계에 경과가 있느냐'라는 질문은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데 우리는 평소에 숨 쉬듯이 시간의 경과를 경험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만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항상 변하지 않는가? 이렇게 뻔한 사실에 왜 의문을 가지는가? 하지만 많은 철학자는 경과에 관해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있기가 어렵다고 시사하는 많은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중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철학자들은 경과의 '정의'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한다. '경과'의 말뜻에 포함되는, 현재가 때마다 변한다는 조항은 현재를 일종의 운동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의 운동을 기술할 때 우리는 그것의 이동 거리를 이동 시간으로 나눈 비율, 즉 속력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가 시점 t1에서 t2로 옮겨 갔다고 해보자. 그러면 시간이 이동한 거리는 |t2-t1|인 것 같다. 하지만 이 거리를 나눠야 하는 시간은 무엇일까? 시간 자체는 아닌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가 1초당 1초 움직였다고 하면 그 분수는 시간 단위가 사라지고 남는 그냥 1이라는 수인데, 수 자체는 비율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흐르는 더 높은 차원의 시간인 이른바 초시간(hypertime)이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초시간도 시간의 일종이면 그 초시간도 경과해야 하는가? 이 문제의 교훈은 '시간의 경과'가 말 그대로의 뜻을 가지는 게 아니라 아니라 일종의 '은유'라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운동에 빗대어 생각하지만 시간은 운동이 아니다. 그리고 운동이 아닌 시간이 무엇일지를 밝히기는 어렵다.

둘째, 그렇다면 시간이 경과한다는, 우리가 선명하게 가지는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경과가 세계 외부에서 오는 감각인지를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 우리에게 붉게 보이는 시각적 느낌이 있을 때, 우리는 외부에 그 붉은 느낌을 일으키는 원인, 즉 외부 대상을 가리킬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흐른다는 느낌을 가질 때 우리는 세계의 어떤 측면에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가리킬 수 있는가? 아마도 경과의 경험은 착시와 같아서, 사실은 세계에 없는 특징을 있다고 보는 착각일 수도 있다. 또는 우리의 뇌가 세계가 흐른다고 하는 망상을 하게끔 조직돼 있을 수도 있다.

시간이 경과한다는 것이 우리의 오해라면 그것에 기반한 우리의 모든 생활양식의 의미가 뒤집힐 수도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사건이 전혀 흐르지 않고 시간적인 전후 순서만 지키면서 이미 그 자리에 '얼음' 상태로 존재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과거의 것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고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될지 기대할 필요가 없을까? 인생의 시간은 지나가도 무의미하지만 지나가지 않아도 무의미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