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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2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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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착각에 불과한가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삶의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시간이 없다는 논증은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삶의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시간이 없다는 논증은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에는 안 보여도 삶에 매우 중요한 것들이 있다. 공기는 그중 하나다. 우리는 공기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공기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공기의 존재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공기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공기의 중요함을 느끼려면 공기가 부족한 곳에 있어 보면 된다. 우리는 숨이 막히면 공기의 중요함을 비로소 깨닫는다. 숨을 쉬는 것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공기와 비슷하지만 더 중요한 시간 개념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시간은 어떤 점에서 공기와 비슷할까? 우선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다. 우리는 물건을 보듯이 시간을 직접 보지 않는다. 누군가는 시계를 가리키면서 시간을 본다고 할지 모르지만 시계는 시간 자체가 아니라 시간의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간이 있느냐고 물을 때 당연히 있다고 답할 것이다. 더 나아가 시간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시간의 중요함을 알려면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 처해보면 된다. 모르는 문제를 두고 끙끙댈 때 남은 시험 시간 5분은 얼마나 소중한가? 시간은 우리의 자유로운 삶이 펼쳐지는 보이지 않는 무대다.

우리는 이토록 흔하고 중요한 시간에 익숙하다. 하지만 정작 누군가가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답할 말이 별로 없다. 서양 중세 교부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는 자에게 내가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대표로 잘 보여주듯이 철학자들은 시간을 이해하는 데 골치를 썩어왔다.

 


그러면 도대체 시간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을 내리는 건 무리이겠지만 우리는 흔히 시간의 필수 특징으로 보이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첫째, 시간에는 순서가 있다. 강화도조약은 왜 갑오개혁 이전인가? 조약이 맺어진 1875년이 개혁이 일어난 1894년 이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 안의 일들은 서로 이전과 이후 또는 동시 관계를 맺는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시간은 어떤 방향을 따라 줄지어 있는 것이다. 둘째, 시간에는 흐름이 있다. '현재 6·25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1950년에는 참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재'가 가리키는 시간이 변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먼 미래에서 가까운 미래로, 그리고 현재로, 그리고 과거로, 그리고 더 먼 과거로 흘러간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시간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헛소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특성을 항상 경험하고 있고, 그러면 시간은 당연히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 철학자 존 엘리스 맥태거트는 우리의 상식을 거슬러 시간은 없다는 신기한 주장을 했다. 맥태트의 전략은 이렇다. 순서와 흐름은 시간의 필수 특징이다. 하지만 맥태트가 보기에 시간이 있으려면 순서만 있어서는 안 되고 흐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흐름에는 문제가 있다. 결국 시간은 없다. 그의 논의를 천천히 따라가보자.

첫째, 왜 시간은 순서만으로 부족할까? 맥태트는 시간이 변화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맥태트에 따르면 순서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없다. 2022년 4월의 정부는 2022년 5월의 새 정부 이전이다. 그런데 이 순서에 관한 사실들은 변하지 않는다. 이 두 사건의 전후 관계는 언제 보든 유지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변하지 않는 사실은 변화일 수 없다. 어느 한 순간에서 불붙인 성냥의 위쪽이 뜨거운 동시에 아래쪽이 차갑다고 하는 걸 보고 변화라고 하지 않듯이 말이다. 결국 시간은 변화의 근거이지만 순서만으로는 변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진정한 변화에는 순서만 아니라 흐름도 필요하다. 흐름이 시간의 본질이다.

둘째, 왜 시간의 흐름은 문제가 있는가? 맥태트에 따르면 시간 내의 모든 사건은 과거이거나 현재이거나 미래이고 이는 계속해서 흐르는 사실들이다. 그런데 '현재'는 상황마다 가리키는 때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가 '언제' 현재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질문에 날짜로 답할 수 없다. 날짜는 순서에 숫자를 붙인 것에 불과하고, 순서는 시간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질문에 '과거·현재·미래에'로 답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재에 현재다"라고 답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또 앞에 나온 현재가 언제 현재인지를 물어야 할 것인다. 그렇게 "…에 현재에 현재다" 식의 답변이 무한히 이어진다. 결국 현재가 언제인지는 대답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를 만들 수 있다. 시간의 본질인 흐름에는 문제가 있다. 결국 그런 시간은 없다.

맥태트가 생각만으로 시간을 없애는 황당한 논증을 보여줬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논증의 문제는 썩 분명하지 않고, 지금도 많은 철학자가 이 논증에 반대하느라 애먹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순서만으로 시간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자세의 변화는 내가 앉음에서 내가 일어섬이 전후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불과하다. 또 다른 철학자는 흐름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절대적으로 현재만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가 존재할 '언제'는 없다. 현재는 그냥 현재로 있을 뿐이다.

자유롭게 계획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바탕인 시간이 없는 삶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려면 우리는 철학자들만큼 깊이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