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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교양·진학 인문

일어날 숙명은 피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떻게 못 해도 앞으로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매경DB]
사진설명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떻게 못 해도 앞으로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매경DB]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여러 가지 선택을 한다. 우리는 오늘 저녁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해 더 좋아 보이는 메뉴를 고른다. 또 우리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노래방을 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수학 문제집을 본다. 이 모든 선택은 우리의 노력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미 일어난 결과는 어떻게 못 해도 앞으로는 '내가 하기 나름'이다.

미래가 열려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있을까? 물론 미래에도 반드시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한, 한반도에서 개기일식은 2035년 9월 2일에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우주 저 멀리서 일어나는 일들 말고,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많은 일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저녁에 파스타를 먹는 대신에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고, 수학 문제를 풀기보다 노래방에 있었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건 불가피하지 않고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미래는 열려 있는 게 틀림없는데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정해졌다면 그건 우리와 상관없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사실은 일어날 모든 일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우리가 그 일들을 알 수 없을 뿐인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숙명론(fatalism)이라고 한다. 일어날 모든 일은 불가피하게 일어나고 우리가 달리 할 방도는 없다. '케 세라 세라'(스페인어로 '뭐라도 되겠지'라는 뜻)라는 유명한 노래의 가사는 이런 생각을 잘 담고 있다. "뭐라도 되겠지/우린 미래를 못 봐" 숙명론이 맞는다면 미래를 바꿔보려는 우리의 어떤 노력도 헛될 것이다. 내가 어차피 논술고사에 합격할 것이면 논술을 대비할 필요가 없고, 어차피 불합격할 것이면 또 그 때문에 대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숙명론을 상상해볼 수는 있어도 그게 맞는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는가? 그런 이유는 우리의 상식을 크게 뒤엎을 이유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은 열린 미래와 행동의 자유라는 우리의 상식을 세계와 논리에 관한 다른 상식들이 위협할 수도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명제론' 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지지하지 않는) 해전과 관련된 유명한 숙명론 논증을 다룬다.

 


숙명론 논증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논리와 세계에 관한 어떤 사실들을 알 필요가 있다. 첫째, 모든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명제는 우리가 의미를 이해하는 문장의 내용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명제의 참이나 거짓은 우리가 모르더라도 참이나 거짓으로 결정돼 있다. 예를 들어 '마다가스카르의 수도는 안타나나리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 관한 사실을 모르는 누군가는 이 문장의 참·거짓 여부를 모르겠지만 그가 알건 모르건 간에 저 문장은 참이다. 논리학에서 이 원리는 '양가 원리(兩價, 진릿값이 두 개뿐)'로 불린다. 둘째, 과거는 고정돼 있다. 미래는 불가피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반면,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 사실은 명제와 관련해 이해해볼 수도 있다. 즉 과거에 관한 명제가 있다면 그 명제의 진릿값은 고정된다. 예를 들어 과거에 관한 명제 "마다가스카르는 1897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참이면(실제로 참이다), 미래에 그 명제를 거짓이게 할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숙명론 논증을 이해할 준비가 됐다. 지후의 어머니는 2005년에 무속인에게서 지후에 관한 점괘를 듣는다. "당신의 아들은 2035년에 판사가 될 겁니다." 2015년에 어머니는 지후에게 그 점괘를 들려준다. 지후는 이 점괘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무속인이 점괘를 말했던 2005년에 그건 그게 명제라는 이유로 양가 원리에 의해 그때 참이거나 거짓이었다. 그 명제가 2005년에 참이었다면 지후는 2035년에 판사가 될 것이다. 게다가 지후가 2035년에 판사가 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 명제는 2005년에 참이 아니게 될 텐데 과거는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그 명제가 2005년에 거짓이었다면 지수는 2035년에 판사가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지후가 2035년에 판사가 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면 그 명제는 2005년에 참이게 될 텐데 과거는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지후가 2035년에 판사가 되든 안 되든 반드시 되거나 반드시 안 될 것이므로, 지후는 일어날 일을 막을 수 없다. 게다가 이 논증은 지후 말고 다른 사람들, 판사가 되는 일 말고 다른 일들, 그리고 2005년 말고 다른 시점들로 일반화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일은 반드시 불가피하게 일어날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숙명론의 논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논리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 이를 논박하려고 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래의 우연한 사실에 관한 명제에 한해 양가 원리를 거부하면서 숙명론을 피하는 전략을 취했다. 어떤 명제는 참도 거짓도 아닐 수 있다. 다른 사람은 과거의 고정성을 거부한다. 중세 철학자 오캄은 미래에 관련된 과거 명제에 한해 미래에 일어나는 일에 따라 진릿값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숙명론의 결론이 우리 행동의 자유와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내가 내일 저녁으로 파스타를 먹지 않을 수 없어도, 내가 원해서 먹었고 외부의 강제가 없었다면 나는 파스타를 자유롭게 먹었다.

물론 제시된 이 해결책들은 논리와 시간과 자유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급진적으로 수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들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숙명론 논증만큼 강한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숙명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의미 없는 노력을 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수고가 유의미하려면 세계는 어떻게 생겨야 하는가? 반대로 세계가 이러저러하게 생겼다면 우리의 수고는 유의미한가? 의미를 찾는 사람은 철학을 불가피하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