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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교양·진학 인문

'관용' 권하는 사회, 무조건 참는 게 능사일까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다문화 사회는 이제 우리 앞의 현실의 풍경이 되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다양한 인종, 민족, 사회적 지위, 성별, 종교, 이념을 경험한다.

'다양'이라는 말은 풍성하고 긍정적인 어떤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실제로 다양함은 갈등과 다툼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슬람 사원 건축에 반대하는 동네 주민들, 퀴어 퍼레이드와 보수 기독교의 맞불 집회 등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와의 갈등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관습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으면 우리는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다. 관용은 갈등을 완화하고 사회를 유지할 중요한 시민의 미덕이다.

철학자들은 관용 개념에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 우리가 어떤 믿음을 관용한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그게 도덕적으로 틀렸거나 나쁘다고 여겨야 한다. 바꿔 말하면 관용에는 반대 요소가 있어야 한다. 내가 클래식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내가 클래식에 가질 수 있는 태도는 기껏해야 무관심이나 긍정일 것이다. 둘째, 우리는 어떤 믿음에 반대하는 부정적인 이유를 능가해 그 믿음을 수용할 긍정적인 이유가 있을 때 관용한다. 즉 관용에는 수용 요소가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부르카를 쓰는 행동이 여성 억압적이라고 반대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이 부르카를 쓰지 않으면 처형당한다는 걸 고려하면 그 여성이 부르카를 쓰는 행위를 수용해야 한다. 셋째, 어떤 믿음이나 행위에 대한 반대의 이유가 수용의 이유보다 커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불관용해야 한다. 즉 관용에는 거부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아성애의 반대 이유가 수용 이유보다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또는 반대 이유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를 토대로 우리는 관용의 개념을 분석할 수 있다. 관용은 일반적으로 1) 틀렸기 때문에 누군가가 반대하지만 2) 다른 이유로 여전히 수용할 만하므로 3) 거부되어서는 안 되는 믿음, 행위, 관행을 수용하거나 그것에 간섭하지 않는 태도다. 이는 관용을 뜻하는 서양 언어의 단어의 뜻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자어 '관용(寬容)'을 풀면 '너그러운 얼굴'이라는 뜻으로 관용의 태도 자체보다는 관용자의 인품이 부각된다. 반면 관용을 뜻하는 영어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 tolere는 힘든 것을 참거나 견딘다는 뜻으로 관용의 반대 및 수용요소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관용은 꼭 '너그럽게' 견디는 것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대로만 관용할 수 있다면 사회의 많은 갈등이 해소될 것처럼 보인다.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믿음이나 행위의 대부분이 틀려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면 관용을 권장하는 건 필수로 보인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몇 가지 역설을 통해 관용 개념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에 도달한다는 걸 확인했다.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A인종주의자는 B인종이 자신과 동등한 사회적 대우를 받는 것이 도덕적으로 틀리다고 여긴다. 하지만 A인종주의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B인종을 관용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는 전략적인 이유로 B인종을 관용한다. 위의 분석에 따르면 이 인종주의자는 B인종을 관용한다.

그런데 관용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우리의 평범한 생각을 고려하면 A인종주의자 역시 도덕적이다. 게다가 그가 B인종을 혐오하는 정도가 클수록 그의 관용의 정도는 커지기 때문에 그를 더 도덕적이게 할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혐오 덕분에 유덕한 사람이 된다! 관용 개념에서 비롯되는 이 역설을 '인종주의자 역설'로 부르자.

다음으로 우리는 관용에 관해 '불관용은 불관용으로'원칙이 성립한다고 본다. 즉 불관용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 행동, 관습을 관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은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누가 누구를 무슨 기준으로 불관용하다고 판단하는가? 앞서 살펴본 관용 개념의 분석에는 거부 요소가 있었다. 즉 거부 요소는 관용의 한계를, 그러니까 수용 요소보다 반대 요소가 커지는 경계를 설정하는 일과 관련된다. 하지만 관용이 항상 불관용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는 걸 뜻하고 그 한계 설정이 그 자체로 멋대로이고 불관용적이면 관용은 애초부터 시작할 수 없다. 관용은 항상 멋대로 무언가를 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이를 '한계 설정의 역설'로 부르자.

왜 관용 개념은 이런 결과를 낳는가? 이 역설들의 핵심은 관용 개념이 그 자체로는 무엇을 반대하거나 거부할 실질적인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종주의자 역설은 인종주의자의 반대 요소가 객관적인 도덕적 사실이 아니라 그의 주관적인 판단이었다는 데에서 생겼다. 또 한계설정의 역설은 관용과 불관용의 한계선을 자의적으로 설정한다는 데에서 생겨났다.

따라서 두 역설의 교훈은 하나로 수렴한다. 즉 관용을 이루는 요소들은 사회의 객관적인 공통규범에 의거해야 한다. 규범은 우리에게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반대 및 수용 이유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객관적으로 올바른 이유를 제공한다. 어떤 이유가 반대나 수용, 거부 이유가 될 수 있는지를 사회의 공통규범을 통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도덕적으로 관용하고 도덕적으로 불관용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문화를 제대로 포용하기 위해 공통의 규범을 찾아야 한다. 관용은 그 자체로는 미덕이나 가치가 아니다. 관용은 옳은 공통기반을 찾으려는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 위에서만 가치가 있다. 무조건 참는 게 능사가 아닌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