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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3일 수요일

교양·진학 인문

흰 분필이 ˝모든 까마귀가 검다˝의 증거라고?

철저한 입증은 바른 사회의 근간
가설에 대한 다양한 검증 시도가
판단 오류 줄이고 신뢰도 높여

헴펠이 제시하는 `까마귀 역설`
단순한 증거 수집 방식 벗어나
논리적 동일성으로 사례 입증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설명[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당신이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집 안이 온통 난장판이라고 해보자. 소파와 침대는 흐트러져 있고, 휴지는 갈갈이 뜯어져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다. 집에는 어제 입양한 고양이 빼고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난장판이 당신 고양이의 소행이라고 단정 짓기는 아직 어렵다. 당신은 소파와 침대의 할퀸 흔적과 고양이의 발톱 자국을 대조해보고 둘의 모양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더군다나 고양이만 올라갈 수 있는 높은 캣타워에 휴지 조각이 널브러져 있다.

귀여운 범인(고양이)을 색출하는 이런 사례는 우리가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 아주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고양이가 집을 어지럽혔다는 명제의 참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런 명제를 가설이라고 한다. 이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하려면 이를 뒷받침해 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할퀸 자국과 고양이 발톱의 대조라든지, 캣타워 위 휴지 조각 같은 것 말이다. 이런 것을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이런 증거를 통해 가설이 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만에 하나 고양이가 아닌 누군가가 집을 어질러 놓았을 수도 있지만 증거로 미뤄보건대 그럴 개연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이렇게 증거를 통해 가설을 뒷받침하는 행위를 우리는 입증이라고 한다. 입증은 위의 일상적인 사례를 넘어 모든 과학의 보편적 탐구 방법이기도 하다. 세계에 관한 사실을 알고 싶은가? 증거를 모아 뒷받침하라!

입증을 뒷받침하는 방법은 논리학자들이 '귀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논리학에서는 어떤 명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연역이다. 연역은 어떤 전제가 참일 때 결론이 참이라는 걸 반드시 보장하는 뒷받침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사람이고 사람은 동물이라면 소크라테스는 동물이라는 건 반드시 참이다. 이러한 관계가 성립하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 전제가 참이라는 것만 알면 우리는 발로 뛰어 확인하지 않고도 결론이 참인 것을 안다. 반면 두 번째 뒷받침 관계인 귀납은 전제가 참일 때 결론이 참이라는 걸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지만 매우 그럴듯하게 보장한다. 예컨대 흡연자의 80%가 폐암에 걸린다는 게 참이라고 해보자. 그리고 호준이가 흡연자라고 하자. 그렇다면 호준이가 반드시 폐암에 걸린다고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호준이는 아마 운이 없는 쪽에 속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서 호준이가 폐암에 걸린다는 건 매우 그럴듯하다. 결론이 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실제로 흡연자의 80%가 폐암에 걸리는지를 확인해봐야 한다. 증거와 가설의 입증 관계는 귀납적 뒷받침 관계다. 입증은 증거를 통해 가설을 매우 강하게 뒷받침하는 행위이고,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어떠한지를, 즉 그 가설과 관련된 증거를 확인해야 한다.

 

 

증거를 모아 일반 가설을 입증하는 것은 쉬워 보인다. 예를 들어 영수가 오늘 까마귀를 보고, 내일도 까마귀를 보고, 모레도 까마귀를 봤는데, 모두 검었다고 하자. 그러면 영수는 이 세 가지 증거를 통해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가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영수가 훗날 조류학자가 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까마귀를 관찰해보고 (모든 까마귀 중 약 95%를 관찰했다고 하자) 모두 검었다고 하자. 그러면 영수는 모든 까마귀가 검다고 매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증거를 많이 모아 일치하는 패턴을 찾아라!

그런데 철학자들은 입증이 그렇게 단순한 일인지를 의심하게 할 만한 사례를 고안해냈다. 다시 까마귀 사례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가설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였다. 논리학에서 이 가설이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까마귀이면 그것은 검다'는 조건문과 의미가 같다. 또 이 조건문은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검지 않으면, 그것은 까마귀가 아니다'는 조건문과 의미가 같다. 검지 않은 모든 것은 까마귀가 아니라는 가설을 입증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검지 않은 책상, 의자, 연필, 책 등을 충분히 모으라. 우리가 앞에서 했던 입증 방식에 따르면 이 증거는 우리의 가설을 입증해준다. 그런데 이 가설은 우리의 원래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와 똑같은 가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까마귀가 아닌 것으로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증거를 통해 가설을 뒷받침하는 입증 방법을 내세웠던 카를 G 헴펠은 이러한 역설이 문제가 없다고 본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느낌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심리적 문제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학자들은 다른 입증 방법을 제안했다. 그들에게 가설을 입증하는 방법은 가설을 세웠을 때 그것에 반대되는 증거가 안 나오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면 단지 까마귀가 아닌 것만으로 이 가설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가설-연역적 방법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근래에는 고도로 발전된 확률론의 방법을 통해 입증을 해명하려는 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입증이 무엇이고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의 고민은 단지 실험실 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 근간을 이루는 것은 올바른 입증이 이뤄지고 있다는 신뢰이기 때문이다. 증거를 통해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 판사나 증상을 통해 잘못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의사를 생각해보라. 올바르지 않은 입증은 우리 사회의 신뢰와 안전한 삶을 해친다. 올바른 입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을 남에게만 미뤄서는 안 되는 이유다.

▶▶ 한충만 선생님은…

△연세대 철학과 박사과정△상상국어모의고사 출제위원△대원여고 인문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