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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6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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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아도취 말라˝ 100년전 中작가의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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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아Q정전
 
사진설명
 
루쉰은 왜 '아Q'를 선택했을까?

'아Q정전'은 중국의 국민작가 루쉰의 소설로 농촌의 날품팔이꾼 아Q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 변혁기를 겪고 있는 민생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 안으로는 구성원들의 누적된 불만과 사회 혼란으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대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국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이 탄생하지만 성공적인 혁명은 아니었다.

이 소설은 아Q를 위해 정전을 쓰고자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정전, 즉 전기라 하면 대단한 인물에 대한 기록을 기대하게 되는데 아Q는 그런 인물과 거리가 멀다. 보통의 소설은 중심인물에 밀착되어 그 행동과 사고를 진지하게 따라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Q라는 중심인물을 등지고 서서 조롱 섞인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이 소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만 자국민 편에 서서 그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루쉰에게는 부패하고 무능한 국가뿐 아니라 우매한 민족도 개혁해야 할 대상이었다. '아Q정전'은 당시 중국인을 뜨끔하게 할 정도로 정확한 묘사라고 찬사를 받기도 했다. 루쉰이 비판하고자 한 것을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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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첫 번째, 중국인들의 의미 없는 자아도취를 비판하고자 했다. 웨이좡의 토곡사라는 사당에 사는 아Q는 날품팔이를 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마을에서 가장 무력하고 비겁한 사람이었다. 상대를 대충 가늠해 약한 이들에게는 욕을 퍼붓고 두들겨 팼다. 건달에게 모욕이라도 당하게 되면 '노려보는' 방법을 택해 "네까짓것들과는 상대도 안 돼"라는 자신만의 '정신승리법'으로 만족해하곤 했다. 아Q는 스스로를 완벽한 인간이라 칭하면서 항상 자존심을 세우고 모든 것을 경멸한다. 루쉰은 아Q의 모습을 통해 중국인들의 어리석은 자아도취를 보여주고자 했다. 실질적으로 우월한 서구 세력의 등장에 중국의 전통적 가치관은 허점을 드러냈지만 중국은 여전히 자신의 정신문명이 가장 뛰어나다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유교적 유산은 그 시기 가장 버거운 짐이었다.

두 번째, 혁명의 한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키던 아Q는 자오 나리 댁의 하녀를 희롱한 일로 웨이좡에서 쫓겨나게 된다. 굶주림 끝에 성으로 들어간 아Q가 웨이좡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돌아온 그는 성 안에서 존경받는 거인 나리 집에서 일했다고 했고 옷차림이 달라져 있어 웨이좡의 사람들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실제 성 안에서 아Q는 일개 도둑이었다. 어느 날 혁명당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나간다. 아Q도 그들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들어온 터였다. 웨이좡 사람 모두가 당황하는 모습이 아Q에게는 어쩐지 즐거운 일이었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아Q는 어디서 들어본 "반란이다. 반란을 일으키자" 하고 외쳤고 웨이좡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의기양양해진 아Q는 하루 종일 혁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하지만 이미 혁명은 이뤄진 뒤였다.

무언가 본보기가 필요한 시기였다. 그 대상이 아Q였다. 아Q는 밤중에 갑자기 체포되어 성 안으로 끌려와 영문도 모른 채 조리돌림 뒤에 사형을 당한다. 질서를 위해 본보기로 무고한 이를 죽이는 일이 그들이 한 일이었다면 혁명의 실체와 정당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아Q의 죽음 뒤에도 약탈 사건은 계속되었고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혁명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망한 왕조의 분위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세 번째, 중국인의 만성적인 무관심을 지적하고자 했다. 아Q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떠한 충격도 주지 않는다. 혁명이 왜 일어났으며 아Q가 왜 죽어야 했는지는 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모처럼의 구경거리가 너무 시시하게 끝났다는 것에 분개할 뿐이었다. 진짜 구제되어야 할 대상이 혁명에서 배제되었지만 그 대상은 무지와 무관심 때문에 문제 제기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루쉰은 '쇠로 된 방'의 예를 들곤 했다.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쇠로 된 방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하자. 누구라도 큰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을 깨워야 한다. 모두 다 질식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죽기 전 슬픔조차 느낄 수 없을 테니 이보다 불행한 일은 없다. 그걸 지켜보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너무 미안한 일이다. 벽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 안에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울 수 있고 그들은 결국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이다. 루쉰이 평생을 바쳐 해온 일은 진심을 다해 쇠로 된 방의 벽을 두드리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