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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5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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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엔 눈물만 흥건˝… 恨 많은 여성천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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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시인 허난설헌
바람기 많은 남편 때문에
평생 속앓이만 하다 단명
가부장제에 비판 목소리
직접 남편을 저격하기도
그속엔 홀로 남은 슬픔이

조선중기 여성 시인 허난설헌. 게티이미지뱅크



가끔 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유명한 사람들이 알고 보니 가족인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고전문학에도 남매 작가가 있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과 다양한 고전시를 남긴 여성 작가 허난설헌은 남매다. 이 남매는 모두 작가로서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남매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허균은 정치 싸움에서 희생당했고, 허난설헌도 불우한 결혼 생활로 괴로워하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생을 마감했다.

또한 이 남매는 사회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꼬집어내는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홍길동전의 큰 줄거리만 떠올려봐도 서얼에 대한 차별, 양반에 대한 비판과 같은 기득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내용이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당대 문헌에서 허균을 '천지 간 괴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기득권 계층이 이런 작가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봤을 리 없는 것이다.

허난설헌도 마찬가지다. 허난설헌은 글에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토로했다. 그는 열다섯 살에 결혼했는데 그의 남편은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결혼 이후 가정을 돌보지 않고 늘 밖으로 돌아다녔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남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글로 표현했다. 이는 당대 도덕적 관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불어 남편에 대한 비판은 당대 가부장제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그윽한 뜨락에 핀 살구꽃 비처럼 지고 / 목련꽃 핀 언덕에 꾀꼬리 지저귀네.

비단 휘장 안쪽엔 참 봄기운이 스며들고 / 박산향로에선 향내음이 하늘거린다

잠에서 깨어난 미인 곱게 단장하고 / 고운 비단 옷에 원앙새 패물 둘렀네 (중략)

황금 굴레 안장 얹고서 어디로 가셨나요 / 정다운 앵무새 창가에서 지저귀네 (중략)

시름 많은 여인 밤새 홀로 잠 못 이루었으니 / 먼동이 트면 명주수건에 눈물 자국만 가득하다



허난설헌의 한시 '사시사(四時詞)' 중 '춘사(春詞)'에 해당하는 노랫말의 일부다. 서두에는 봄날의 아름다운 풍경이 묘사된다. 그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봄의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화자의 슬픔이 짙게 묻어난다.

'황금 굴레 안장 얹고서' 떠난 사람은 작가의 남편일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남자가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여자는 꼼짝없이 떠난 남자만을 그리워하며 기다려야 하던 시절이다. 정다운 앵무새를 바라보는 화자의 슬픈 심정이 와닿는 대목이다. 밤새 수건에 눈물을 닦아내야 하는 화자의 심정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나에게 아름다운 비단 한 필이 있어 / 먼지를 털어 내면 맑은 윤이 났었죠

봉황새 한 쌍이 마주 보게 수놓여 있어 / 반짝이는 그 무늬가 정말 눈부셨지요

여러 해 장롱 속에 간직하다가 / 오늘 아침 임에게 정표로 드립니다

임의 바지 짓는 거야 아깝지 않지만 / 다른 여인 치맛감으로는 주지 마세요

보배와 같은 순금으로 / 반달 모양 노리개를 만들었지요

시집올 때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 / 다홍 비단 치마에 차고 다녔죠

오늘 길 떠나시는 임에게 드리오니 / 서방님 정표로 차고 다니세요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는 않지만 새 여인 허리띠에만은 달아주지 마세요.


허난설헌의 한시 '견흥'의 3수와 4수다. 앞선 작품보다 더 직설적이다. 앞선 '사시사'에서는 계절의 아름다움에 곁들여 화자의 슬픔을 풀어냈다면 이 작품에서는 더 노골적으로 남편을 저격하고 있다.

귀한 비단으로 바지를 만들어 드릴 테니 다른 여자의 옷감으로 쓰이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한다. 이 당부는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남편이 얼마나 문란하고 경박한 사람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어서 시부모님이 주신 노리개를 줄 테니 다른 여인의 허리에 달아주지 말라고 부탁한다. 부탁의 가면을 쓴 비난이다. 남편의 가벼운 행동은 이 결혼을 추진한 남편의 부모까지 욕보이게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언급하고 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가의 남편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여성이 자신의 남편을 욕보이는 글을 남긴 것이다. 남편의 외도를 정면으로 비난하는 이 작품에서 허난설헌은 남편에 대한 직접적인 저격을 통해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부모님이 낳고 길러 몹시 고생하시며 길러주실 때 / 자체 높은 배우자는 못 바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길 원하셨는데 / 삼생의 원망스러운 업보로, 월하노인의 연분으로 / 놀기 좋아하는 경박한 사람을 꿈같이 만나두고 / 그때의 마음 쓰기가 살얼음 디디는 듯 조심스러워 (중략)



삼삼오오 다니던 기생집에 새 기생이 왔단말인가 / 꽃 피고 날 저물 때 정처 없이 나가 있어 / 흰말에 금 채찍 휘두르며 어디어디 머무르는가 / 멀고 가까움을 모르니 소식이야 더욱 알겠는가 (중략) 여름날 길고 길 때에 궂은비는 또 무슨일인가. / 봄날의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경치도 관심없다. / 가을 달이 방에 비추고 귀뚜라미가 침상에서 울 때에 / 긴 한숨 떨어지는 눈물 어찌할 도리 없이 생각만 많다. /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구나.



대나무 숲 푸른 곳에 새소리 더욱 서럽다. / 세상에 서러운 사람 수없이 많다 할 수 있지만 / 운수 나쁜 젊은 여인으로 나만 한 이 또 있을까. / 아마도 이 임의 탓으로 살동말동 하여라.


마지막은 가사다. 가사는 길이의 제한 없이 길게 늘어 놓을 수 있는 갈래이기에 신세 한탄에 적합하다. 허난설헌은 가사 '규원가'를 통해 자신의 신세를 토로하며 남편과 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있다. 서두에서는 자신을 키워주신 부모님의 노고를 언급한다. 이 이면에는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사랑으로 기른 귀한 자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남녀가 평등하지 않던 시절, 시대를 앞서간 허난설헌의 비판적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작가의 남편은 기생집에 새 사람이 오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박한 사람이었다. 보통 당시 여성들은 양가 부모가 짝지어 주는 대로 결혼을 했다. 자신의 선택과 의지가 섞인 결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형편없는 남편을 만나는 것은 운에 따른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구나' '이 임의 탓으로 살동말동 하여라'란 구절은 조금 더 높은 수위로 남편을 질책하고 있다. 부인이 살 수 없을 정도의 괴로움과 슬픔의 원인이 남편임을 비판하는 것이다.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는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당대에는 그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그들이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남매 작가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고전문학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사회의 모습을 읽어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