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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27일 토요일

교양·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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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전할 수 없는 진심, 노래라면 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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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시가 곧 노래
우리가 배우는 고전시
조상들은 노래처럼 향유
말로 표현 못하는 감정
노래 부르면서 드러내

 

이황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생일 파티 장면을 상상해보자. 선물과 편지, 케이크 같은 것을 준비하고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생일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연출한다. 누가 뭐래도 생일 파티의 하이라이트는 다 함께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생일'을 떠올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생일 축하 '노래'가 떠오른다. 그런데 새삼스레 의문이 든다. 사람들은 왜 중요한 순간에 꼭 노래를 부를까.

사람들은 노래를 자주 부른다. 기쁠 때, 슬플 때, 축하할 때, 고백할 때 등 참 다양한 순간에 노래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가수가 아닌 사람에게도 노래 부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수가 아닌 사람이 노래로 마음을 표현하면 상대는 감동을 받거나 그 사람의 마음이 더 절실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왜 말보다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마음이 더 진심에 가깝다고 생각할까. 노래에는 대체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 그런 의미가 있죠 /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유명한 대중가요의 노랫말이다. 꽤 오래전에 발표되었는데 2015년에 드라마 OST로 리메이크되며 다시금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노랫말 속 화자는 아무 걱정 말라고 한다. 아마 상대가 슬픔과 근심에 쌓여 있는 모양이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건네는 방법이 '노래'인 것이다.

그런데 굳이 말이 아닌 노래를 부르자고 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말보다는 노래가 더 절절한 마음을 전달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속풀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그야말로 힘껏 불러 젖힌다. 노래를 부르면 속이 후련해지며 남았던 감정이 풀어지는 경우가 있다. 노래에서 표현하는 감정의 밀도는 말보다 진하다. 멜로디와 박자에 실린 노랫말은 일상의 말보다 더 격한 감정과 정서가 실리기 쉽다.

'시'도 마찬가지다. 문학의 갈래 '시'는 '서정(抒情)' 갈래에 속하는데 서정 갈래의 기본 속성은 사람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감정 전달에 특화된 노래는 시와 아주 비슷한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 문학의 역사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시와 노래가 분화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현대문학에서는 '현대시'라고 부르지만 고전문학에서는 '고전 시가(詩歌)'라고 부르는 이유도 고전문학에서는 시(詩)와 노래(歌)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시와 노래가 같은 것이었다는 의미다. 지금은 '시'는 읽고 '노래'는 부르지만 과거 고전시가는 모두 부르는 방식으로 향유되었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도산 노인이 지은 것이다. 노인이 이 곡을 지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략) 그러나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어도 노래하지는 못한다. 만약 노래하려면 반드시 시속 말로 엮어야 되니, 대개 나라 풍속의 음절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중략) 이 노래를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익혀서 노래하게 하여 안석에 기대어 듣기도 하고, 또한 아이들이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고 뛰기도 하게 한다면 거의 비루한 마음을 씻어 버리고, 감화되어 분발하고 마음이 화락해져서 노래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 본다. <이황 '도산십이곡 발'> 이황은 조선시대 인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성리학자로 꼽힌다. 윗글은 그가 남긴 시조 '도산십이곡'의 서문에 해당하는 글인데 여기에도 노래의 기능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이황은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 읊을 수 있어도 노래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옛날의 시는 모두 노래로 불렀다고 하는데 노래로 부르지 못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 글에서 '지금의 시'는 한문으로 쓴 '한시(漢詩)'를 의미한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은 구어(口語)와 문어(文語)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마치 현대의 이중언어 사용자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말은 한국어를 했지만 공식적인 글을 쓸 때는 한문을 사용했고, 한문은 그 당시 중국에서 사용하던 문자언어다. 그러니 시를 쓸 때도 한문으로 썼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한시는 읊을 수 있지만 부를 수 없다.

구어에서, 즉 말을 할 때는 한국어를 사용했기에 노래도 한국어로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한시는 한문으로 적혀 있다. 한문은 한국어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부르기는 어려운 것이다. 말과 노래는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이고 음성언어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구어에서 한문을 사용한다면 아무리 이중언어 사용자라 할지라도 그것은 외국어인 것이다.

 


"노래 만든 사람 시름이 많기도 많구나

일러 다 못 일러 불러서 풀었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도산십이곡 발에서 '만약 노래하려면 반드시 시속 말로 엮어야 되니'에서 시속의 말은 그 시대 풍속에 맞는 말, 즉 한국어를 뜻한다. 이제 '나라 풍속의 음절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는 구절도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 말로 사용하는 한국어와 문자로 사용하는 한문은 음절과 발음, 문장 구조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감정의 표현은 글보다는 말에서 더 특화되어 있기에 한국어를 사용해야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조선시대 신흠의 시조를 현대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노래'의 기능과 의미가 잘 설명되어 있다. 노래를 처음 만든 사람은 시름과 걱정이 가득했을 것이라 한다. 얼마나 걱정이 많았으면 말로 다 풀지 못해 노래로 불렀겠느냐는 것이다. 역시 남아 있는 감정과 응어리를 풀어내는 데에는 말보다 노래가 탁월한 것이다.

사람들이 감정과 기분을 드러낼 때 굳이 '노래'로 부르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노래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더 극적인 표현이라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읽는 것과 부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노래는 감정의 절실한 표현이다. '시(詩)'가 노래와 떨어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말은 모국어를 사용해야 진심과 절실함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고전문학을 향유했던 옛 선조들과 우리는 오랜 시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지만, 같은 모국어로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드러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옛사람들의 노랫말에 공감하며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