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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2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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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 우울증, 조상들은 어떻게 이겨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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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 앓는 화자
민 노인 찾아가 상담
거침없는 입담 덕분에
꽉 막혔던 마음 풀려
개혁 앞장섰던 박지원
소설 속 노인 입 빌려
사회 부조리 꼬집어

 

연암 박지원의 소설 '민옹전(閔翁傳)'



요즘 꽤 흔한 병 중 하나가 '우울증'이다. 우리는 우울증에 걸리면 보통 약을 먹거나 상담을 통해 치료한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 선조들은 어땠을까. 우울증을 앓았던 옛사람들은 어떻게 병을 이겨냈을까.



지난 계유년(1753)과 갑술년(1754), 나이는 열일곱, 열여덟 살로서, 나는 오랜 병으로 지쳐 있었다. 집에 있으면서 노래나 그림, 옛날 칼, 거문고, 골동품과 여러 잡동사니에 취미를 붙이고 손님을 불러들여 우스개나 옛이야기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갖가지로 애썼으나 답답함을 풀지 못했다. 이럴 즈음 어떤 이가 나에게 민 노인을 알려 주었다. 그는 기이한 선비로 노래를 잘하며 이야기도 잘하는데 거침없고 기묘하여 듣는 사람마다 후련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반가워 함께 와달라고 청하였다.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의 소설 '민옹전(閔翁傳)'의 일부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민옹(閔翁)', 즉 민 노인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소설 속 서술자는 병을 앓고 있고, 그 병은 지금의 용어로 우울증이다. 서술자는 우울증을 고치려 애를 썼지만 별 차도가 없던 중에 민 노인의 소문을 듣게 된다. 민 노인은 이야기를 잘하여 그의 말을 들으면 모두 가슴이 후련해진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다.



"그대는 무슨 병인가? 머리가 아픈가?"/ "아니올시다." / "배가 아픈가?"/ "아니올시다."/ "그렇다면 병이 든 게 아니로구먼." / 그러고는 곧장 창문을 열고 들창을 걷어 올리니 바람이 솔솔 들어와 마음속이 예전과는 아주 다르게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래서 노인에게 말했다. / "저는 단지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이 병입니다." 그러자 노인은 일어나서 나에게 축하를 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대는 집이 가난한데 마침 밥을 잘 먹지 못하니 재산이 남아돌 터이고, 잠을 못 잔다면 밤까지 사는 것이니 남보다 갑절을 사는 셈이 아닌가. 재산이 남아돌고 남보다 갑절을 살면 오복 가운데 오래 사는 복[壽]과 재물복[富], 이 두 가지는 이미 갖춤 셈이 아닌가."





민 노인의 이런 말들은 다소 과격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껏 서술자에게 이런 방식으로 다가간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의외의 효과가 나타난다. 어찌 보면 조롱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매우 긍정적인 해석이기도 한 것이다.



"그대가 손님을 불러 놓고는 식사를 차려 내오지도 않고 혼자만 먼저 먹으려 드니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사과를 하고 노인을 주저앉혀 빨리 식사를 차려 오게 했더니 노인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팔뚝을 걷어 올린 다음 수저를 시원스레 놀려 먹어 대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군침이 돌고 막혔던 가슴과 코가 트이면서 예전과 같이 밥을 먹었다. (중략)"내가 어릴 적에는 눈만 스쳐도 바로 외워 버렸는데 이제는 늙었소그려. 그대와 약속하여 평소에 못 보던 글을 두세 차례 눈으로 읽어 보고 나서 외우기로 하세. 만약 한 자라도 틀리면 약속대로 벌을 받기도 하고……." (중략) 노인은 '고공기'를 집어 들었고 나는 '춘관' 편을 집어 들었는데 조금 지나자 노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벌써 다 외웠네." 그때 나는 아직 한 차례도 다 내리 읽지 못한 터라 놀라서 노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노인은 자꾸 말을 걸고 방해를 해서 나는 더욱 외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잠이 와서 그만 잠들고 말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어젯밤에 외운 것은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아예 외우지 않았다네."





민 노인의 방법이 독특하고 과격하지만, 서술자에게는 통했다. 서술자는 노인과 만남 이후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물론 조금 어이없는 방법이긴 했다. 민 노인이 책을 외우자고 시합을 제안하여 열심히 외우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서술자는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데 애초에 민 노인은 책을 외울 생각이 없었다. 이런 식의 황당한 방법의 연속이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병세가 호전되었으니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법을 처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서술자는 대체 왜 어린 나이에 우울증이 걸린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어린 그의 마음을 힘들게 했을까. 소설은 허구적인 이야기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작가 박지원은 실제로 어린 나이에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보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노인은 신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신선이 어디에 있던가요?"/ "가난뱅이가 모두 신선이지. 부자는 늘 세상에 매달리지만 가난뱅이는 늘 세상에 싫증을 느끼거든. 세상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략)"황해도에는 황충이 들끓어 관청에서 백성을 풀어 잡느라 야단이라 합니다."/ 노인이 물었다. /"황충을 뭐 하려고 잡는고?"/ "이 벌레는 크기가 첫잠 잔 누에보다 작으며 색깔은 알록달록하고 털이 나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것을 명(螟)이라 하고 볏줄기에 기어오르는 것을 모(모)라 하는데, 벼농사에 큰 해를 끼치므로 이를 멸구라 부릅니다. 그래서 잡아다 파묻을 작정이지요."/ 이렇게 대답하자 노인이 말했다./ "이런 작은 벌레들은 걱정할 거리도 못 된다네. 내가 보기에 종로 앞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황충이야. 길이는 일곱 자 남짓하고 머리는 까맣고 눈은 반짝거리며,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날락할 만한데 웅얼웅얼 소리를 내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줄줄이 몰려다니며 곡식이란 곡식은 모조리 해치우는 것들이지. 그래서 내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만큼 큰 바가지가 없어서 아쉽게도 잡지를 못했다네."



어쩌면 작가 연암은 민 노인의 입을 빌려 자신의 답답함을 풀어내려 한 것일지 모른다. 왕조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조선 후기는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고, 작가는 이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속풀이를 위해 기득권을 향한 비판의 글을 남겼다. 우리는 그가 남긴 소설을 통해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과 그것을 노인의 입을 빌려 비판하려 했던 작가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