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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2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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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간' 노린 별주부, 도망친 토끼…누가 더 잘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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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도 어느덧 3월이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지난해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1월 1일을 맞는다. 명절인 설을 지나야 정말 새로운 해가 밝았다는 생각을 하고, 3월이 시작되고 나서야 완연한 새해라는 실감이 든다. 3월에 새해를 절실히 실감하는 이유는 방학으로 쉬어가던 학교가 다시 북적이고, 한낮의 공기도 부쩍 훈훈해지기 때문이다.

올해 2023년은 토끼띠의 해다. 토끼는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친근한 동물이다. 옛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중 고전소설 '토끼전'은 판소리계 소설의 하나로 토끼전, 별주부전, 토공전 등 다양한 제목을 가지고 있다. 제목이 다양한 만큼 세부 줄거리가 다른 여러 이본(異本)*을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큰 맥락의 줄거리는 모두 같고, 내용은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긴 생명력을 지닌다.

토끼전은 수국(水國) 용왕님이 위독한 병에 걸렸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유일한 약은 육지에 사는 토끼의 간이다. 충직한 신하 별주부는 용왕님을 위해 토끼를 수국으로 데려오고, 위험에 처한 토끼는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하고 도망간다. 그리고 토끼를 놓친 별주부는 자책하며 자취를 감추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이본도 존재한다.

*이본(異本) : 문학 작품에서 기본적인 내용은 같으면서도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책



"형의 관상을 보니 골격이 맑고 빼어나나, 인중이 짧은 게 탈이오.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겠소." 토끼가 의심이 나서 가만히 솔잎을 뜯어내어 인중을 견주어 보니 비록 끝을 잡았지만 떨어져 버리고 만다. "인중이 짧다 해도 수국에 들어가면 화를 면하고 오래 살 수 있겠소." (중략) "그대가 산중 세계를 낙원으로 알고 수국에 가지 않으려 하는 것도 다 인중이 짧은 탓인 모양이오. 가려거든 갈 것이요, 말려거든 마시오. 그대가 수국 가서 아무리 귀하게 된들, 내 몸에 무슨 상관이 있으며 내게 무슨 덕이 있겠소. 정 싫거든 마시오. 오늘 오시에 김 포수가 날린 총알이 긴 허리에 '탕' 맞으면……."

 

별주부가 토끼를 꼬드기는 장면이다. 바닷속 수국으로 가면 벼슬을 하며 귀한 몸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별주부는 충직한 신하이기에 그의 머리에는 용왕을 살려야 한다는 목적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목적을 위한 방법이 도덕적이지 않다. 다른 이를 속이고 목숨을 앗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배경은 '충(忠)'의 가치가 자리 잡은 조선시대다. 왕은 큰일을 하고, 백성은 그보다 더 작고 사소한 일을 하기 때문에 왕과 백성은 같은 사람이지만 귀함의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하던 시대다.

당대의 가치관을 장착한 별주부는 자신이 맡은 바를 그저 충실히 해내는 사람이다. 신하의 근본은 임금을 보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금의 위기는 곧 나라와 백성의 위기이기에 임금을 구해야 많은 백성들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에서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당대 가치관을 충실하게 주입받았다고 가정할 때 별주부를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이제는 의심하지 않겠소. 함께 갑시다." 별주부 기뻐하며 토끼와 함께 물가로 내려선다. "저 물 깊은가요?" "깊지요." "그러면 형이 먼저 들어가시오. 한번 봅시다."

(중략)

토끼가 얼른 내려 주위를 둘러본다. 귀신 얼굴을 한 물고기들이 큰문을 지키고 서 있는데, 문 위에는 순금으로 쓴 '남해 영덕전 수정문'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토끼가 황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별주부에게 칭찬을 늘어놓는다.

결국 토끼는 바다로 간다. 별주부가 속이긴 했지만 바다로 간 것은 결국 토끼의 선택이었다. 토끼도 바닷속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대가가 없는 큰 행운을 얻으려면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육지 동물인 토끼가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도박에 전 재산을 쏟아붓는 것과 다름없다. 편안한 벼슬살이가 매력적이라 인생을 건 도박에 뛰어든 것이다. 따라서 토끼에 대한 평가도 충분히 엇갈릴 수 있다. 별주부의 현란한 말에 속아 스스로 위험을 자초했다고 볼 수도 있고, 포수에게 언제 잡힐지 모르는 삶을 살다 보면 누구나 별주부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위기에 처한 토끼는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별주부는 토끼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수국의 몇몇 신하들도 토끼가 거짓말을 한다고 용왕에게 직언한다. 하지만 용왕은 토끼의 말을 믿는다. 서로를 속고 속이는 이 게임에서 최후의 승자는 토끼인 것이다.



토끼가 그제야 별주부에게 속은 줄을 알고 가슴을 친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다. 토끼가 잠시 눈을 깜짝깜짝 하더니 얼른 한 꾀를 생각하고 배를 앞으로 쫙 내민다. "자, 내 배 따 보시오." (중략)

"원통하다 별주부야, 미련하다 별주부야, 대왕께서 병들었다는 사실을 속이고 그저 달콤한 말로 나를 유혹하기만 했구나. 신하된 도리로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다시 고개를 돌려 용왕을 바라본다. "소토가 별주부를 만났을 때는 보름이 갓 지났을 때였습니다. 갈 길이 급하다고 별주부가 보채기에 이전에 꺼내 둔 간을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사옵니다. 며칠 말미를 주면 인간 세상 간 둔 곳을 찾아가서 저의 간뿐 아니라, 친구들 간까지 널리 구해 들어오겠사옵니다."



이 소설을 두고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토끼와 별주부가 서로를 속였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고소했다고 가정해 보자. 판사의 입장이 된다면 누가 죄인이라 판결해야 할까. 둘은 서로를 속이며 일종의 사기행위를 했다. 별주부는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토끼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과연 누구의 죄가 더 무겁다고 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모든 사람의 귀함은 똑같다는 현대의 가치를 따를 것이냐, 임금의 위기는 나라와 백성의 위기와도 같다는 당대의 가치를 따를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설에서 놓친 인물이 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한 '용왕'이다. 사실 소설이 꼬집어 비난하고 싶은 인물은 용왕일지 모른다. 용왕은 보면 볼수록 참 어리석다. 용왕이 더 현명했다면 토끼 간이 정말 약이 되는지 따져보았을 것이다. 조금 더 냉철했다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자신이 떠난 뒤 나라의 안정을 위한 방안을 마련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용왕은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죽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만으로 행동한다.

토끼전은 간단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던지는 화두나 생각거리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야기가 오랜 시간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도 선과 악으로 단순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다양하고 인물들의 입체적인 입장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전소설을 통해 지금과 옛날의 가치를 비교하고 복잡한 관점에서 행동의 정당성을 판단해 볼 수 있다. 나아가 지도자의 중요성 같은 생각의 폭을 넓혀 갈 수도 있다.